주일, (대)축일 강론
2003.08.30 14:45

B해 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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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해 24주일(이사 50,5-9; 야고 2,14-18; 마르 8,27-35)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치욕적인 명칭으로 호되게 꾸중을 듣는다. 왜 그랬을까?신앙은 항상 전능하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기에 우리 자신이 수치심이나 실패, 한계에 부딪치게될 때, 이들 고난과 고통, 능욕과 죽음 등이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의 전능으로 이들 어려움을 해결하자는 것이 인간의 속셈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로막고 수난을 받는다는 것은 당치 않다고 만류한 것도 그런 속셈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식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패배를 통해서 영원한 승리를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역설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심오한 진리를 깨들은 바오로 사도는 오늘 복음전 노래를 통해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라 6,14)고 외치고 있으며, 화답송에서도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지옥의 올무가 나를 덮쳐, 슬픔과 괴로움이 나를 덮쳐 누를 때 나는 야훼 이름 부르며 빌었노라... 죽을세라, 이 목숨 건지셨도다. 울세라 이 눈들 지키셨도다. 넘어질세라 이 발을 지키셨도다. 나는 거닐으리라. 주님 앞에서 생명의 지역에서 거닐으리라.”(시116,3-4. 8-9).하느님께서는 당신 종들을 해방시키신다.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역경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 후에야 해방시켜 주신다. 신앙은 비록 죽음의 그늘과 어두움의 영역을 거친다 할지라도 영광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능력이다.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고 고백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다. 아직 불충분하고 아직 덜 정화되었다. 아직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다인들과 별차이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다. 그러나 영광의 화관을 쓰시고 대접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야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상이다. 이러한 비뚤어진 메시아관을 바로잡아주시고자 안깐힘을 쓰신다. 가로막는 베드로에게,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느냐? 고 나무라신다. 우리도 일상생활안에서 불편한 일들을 바꾸어 편한 생활로 바꾸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유혹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베드로의 모습은 오늘의 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을 버릴 필요가 있다. 즉 예수님 한 분만 찾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명에 충실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듯이 신자들도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을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나 복음을 충실히 실천해야 할 요구는 항상 뒤따를 것이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고 하여 예수와 복음을 동일시 하였다. 믿음은 항상 현실과 일치해야 한다. 하느님께 충실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으시고 역사 속에 영신적 개혁과 쇄신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셨다. 믿음이 십자가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신비는 어떠한 것이었나? “그분의 발은 더 이상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갈 수 없었고, 그분의 손은 더 이상 눈먼 이들의 눈을 만져줄 수 없었다. 그리고 또한 그분의 시선은 더 이상 마음깊은 속을 꿰뚫어 뒤집어 놓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모든 외적 권능을 포기하신 십자가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셨으며, 동시에 그리스도 신자가 당신 자신과 같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에는 크나큰 힘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셨고 또한 그러한 힘을 그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치욕적인 명칭으로 호되게 꾸중을 듣는다. 왜 그랬을까?신앙은 항상 전능하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기에 우리 자신이 수치심이나 실패, 한계에 부딪치게될 때, 이들 고난과 고통, 능욕과 죽음 등이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의 전능으로 이들 어려움을 해결하자는 것이 인간의 속셈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로막고 수난을 받는다는 것은 당치 않다고 만류한 것도 그런 속셈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식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패배를 통해서 영원한 승리를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역설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심오한 진리를 깨들은 바오로 사도는 오늘 복음전 노래를 통해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라 6,14)고 외치고 있으며, 화답송에서도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지옥의 올무가 나를 덮쳐, 슬픔과 괴로움이 나를 덮쳐 누를 때 나는 야훼 이름 부르며 빌었노라... 죽을세라, 이 목숨 건지셨도다. 울세라 이 눈들 지키셨도다. 넘어질세라 이 발을 지키셨도다. 나는 거닐으리라. 주님 앞에서 생명의 지역에서 거닐으리라.”(시116,3-4. 8-9).하느님께서는 당신 종들을 해방시키신다.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역경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 후에야 해방시켜 주신다. 신앙은 비록 죽음의 그늘과 어두움의 영역을 거친다 할지라도 영광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능력이다.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고 고백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다. 아직 불충분하고 아직 덜 정화되었다. 아직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다인들과 별차이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다. 그러나 영광의 화관을 쓰시고 대접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야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상이다. 이러한 비뚤어진 메시아관을 바로잡아주시고자 안깐힘을 쓰신다. 가로막는 베드로에게,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느냐? 고 나무라신다. 우리도 일상생활안에서 불편한 일들을 바꾸어 편한 생활로 바꾸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유혹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베드로의 모습은 오늘의 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을 버릴 필요가 있다. 즉 예수님 한 분만 찾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명에 충실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듯이 신자들도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을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나 복음을 충실히 실천해야 할 요구는 항상 뒤따를 것이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고 하여 예수와 복음을 동일시 하였다. 믿음은 항상 현실과 일치해야 한다. 하느님께 충실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으시고 역사 속에 영신적 개혁과 쇄신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셨다. 믿음이 십자가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신비는 어떠한 것이었나? “그분의 발은 더 이상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갈 수 없었고, 그분의 손은 더 이상 눈먼 이들의 눈을 만져줄 수 없었다. 그리고 또한 그분의 시선은 더 이상 마음깊은 속을 꿰뚫어 뒤집어 놓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모든 외적 권능을 포기하신 십자가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셨으며, 동시에 그리스도 신자가 당신 자신과 같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에는 크나큰 힘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셨고 또한 그러한 힘을 그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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