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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32주일(2 마카7,1-14; 2데살 2,18-3,6; 루카 20,27-38:신앙-위대한 희망)

 

이번 주일의 말씀전례의 주제는 죽음과 부활이다.

가을녁 미리내 진입로 은행잎이 노랗게 곱게 물든 것을 보면 책갈피에 끼워넣고 싶은 충동이 인다. 주님도 인생황혼기에 곱게 익은 우리 영혼을 보면 그런 마음이 드시리라.

봄과 여름을 지낸 나뭇잎의 결과가 낙엽이듯이, 인간의 삶의 열매가 황혼기의 영혼인 것이다.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 추수기에 그렇게 영근 씨앗이 봄철에 다시 새싹을 틔우는 것은 곧 영혼의 부활을 상징한다.

아직은 나무에 달려있는 나뭇잎이 먼저 지는 낙엽을 비웃는다면, 그는 말하리라. “오늘은 내 차례지만, 내일은 네 차례!”(Hodie mihi, cras tibi.)

무심히 무덤 옆을 지나가는 길손에게 무덤 또한 말하리라.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죽음은 새로운 차원의 삶에로의 도약이다. 그러기에 장례미사 감사송에, “지상의 이집이 무너지면 천상에 새로운 집이 마련되나이다.” 죽음은 이승의 삶의 마감인 동시에 천국의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생에 대한 희망은 죽음을 넘어 새 세상을 쟁취한다.

이 세상을 뛰어넘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새 생명을 쟁취한다는 확신이 있기에 그 어떤 희망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다. 그분만이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의 마케베오 가정의 7형제가 율법을 어기기보다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죽음을 택한 이유도 바로 그 새 생명으로 부활하리라는 강력한 희망 때문이었다.

B.C. 2세기 그리스 제국의 정복자들이 지상천국건설을 꿈꾸며 유다를 정복하고 그들의 민족 전통종교인 야훼 유일신신앙을 뿌리 뽑고자 율법에 금지되어있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고 성전을 모독하는 행위들을 강요하자 유다의 신심 깊은 신앙인들과 마카베오 7형제들은 율법을 위반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죽음으로써 신앙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삶의 가치는 미래 세상에 대한 희망여부에 달렸다.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통해 내일을 창조해 나아간다.

미래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오늘의 십자가를 기꺼이 참아내고 갈바리아 산을 오르는 것이다. 미래 장차올 세상에서 천국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오늘의 가난을 오히려 복된 가난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장차 올 세상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위로 때문에 오늘의 슬픔을 이겨내는 것이다.

내세 영생에 대한 희망 때문에 오늘의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신앙적 박해를 굳세게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사람은 오늘의 향락을 위해 내일을 포기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도전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현세의 안일을 위해 당시 정복자들인 로마 민족에게 빌붙어서 현세적 영달만을 꿈꾸며 내세를 부정하고 현세의 부귀영화만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 뒤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철저한 현세론자들이다.

내세관이 없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사두가이파는 진정한 종교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현세만을 바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현세는 부활의 씨앗을 심는 시기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종자씨앗을 삶아먹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두가이파들은 종자씨까지 삶아먹는 미련한 자들이다. 즉 현세만이 있다며 내세의 부활의 씨앗까지 삶아먹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철학으로 산다. 오늘의 현세쾌락만을 추구하는 신앙 없는 현세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봄에 들판에 심은 것이 없다면 그의 가을은 황량한 들판만이 기다릴 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예수님의 부활 강론을 듣고 해괴한 예를 들어 트집을 잡아온 것이다.

7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결혼하여 자식 없이 죽었다면 유다의 관습에 따라 아우가 형수를 취하여 후사를 이어주려 하였는데, 둘째도 자식 없이 죽고, 차례로 일곱이 자식 없이 죽었다면, ‘그 여자는 소위 당신들이 믿는 그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냐?’는 해괴한 가설로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넣으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는 시집 장가드는 일이 없다고 한 마디로 명쾌하게 설명하신다. 장차 죽은 이들이 부활하게 될 천국에서는 혼배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천사들처럼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세상이 우리를 속인다 해도 하느님은 공평하시다.

-. 그때에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 지금 우리가 억울하게 손해를 보면서도 용서하고 사랑해야하는 이유도 부활 때에 하느님으로부터 후히 상급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리라는 확신보다 마지막 날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더 확실한 사실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저녁에 침대에 들지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마지막 날에 부활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자고 얼어나니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저녁에 준비 없이 침대에 든 영혼은 자고 일어나보니 불붙는 어둠의 장소일 수도 있다.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 여기서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현세에만 묶여 산다면 미래 희망을 저버리는 일이요, 현세의 묶인 데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희망의 꿈나무를 가꾸어나갈 여력이 생긴다. 신앙의 꿈나무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통해 정성껏 가꾼 만큼 장차 도래할 나라에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의 절반이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관한 말씀이다.

칼 바르트는 부활메시지는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부활사건은 너무나 확실한 사건이므로.”라고 말하였다.

 

시골 두 청년의 대화 내용이다. 하나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서울에 가보니 삭막하기만 해! 물도 사 먹어야해!”하니까,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다른 청년이, “! 그러면 가서 물장사하면 되겠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차이다.

문제가 크게 보이면 주님이 작게 보이고, 문제가 작아지면 주님이 크게 보인다. 문제를 바라보면 주님이 안보이고, 주님을 바라보면 문제가 사라진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며 물위를 걷다가 파도를 바라보니 그만 물속에 빠져들었다. 문제를 뛰어넘어 주님을 바라보자. 그러면 문제는 절로 풀리리라.

어떤 선교사가 외딴 시골마을을 차를 타고 가다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할머니를 발견하고 태워 드렸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차안에서도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는 할머니, 머리에 이고계신 짐 내려놓으세요!” 하니 할머니가 내 몸을 태워주신 것도 고마운데 짐까지 신세지기가 미안해서요!” 선교사는 할머니, 기왕에 몸을 맡기셨으면 짐도 내려놓으세요.”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나 자신을 맡겼으면 인생보따리도 내려놓으라고 하신다.

기도할 때 주님께 문제의 보따리를 맡겼다가 기도가 끝나면 다시 보따리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주님이 일 하실 수가 없다.

인생의 운전대를 주님께 맡기자. 주님은 방어운전까지 하시는 분이다.

아프리카의 추장의 주요임무는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가뭄에 비가 오도록 기우제 지내는 일이다. 어떤 추장이 기우제만 지내면 비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추장들이 그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그 추장은 나는 다른 비결 없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였다.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중단 없는 기도자세가 하느님 마음을 움직인다. 야곱이 야뽁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당신이 나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이 손 못 놓겠습니다!”하고 대롱대롱 매달리는 야곱의 태도에 천사가 감동하여 축복해면서 네 이름을 이제부터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라!”<<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자!>> 얼마나 영예로운 이름인가!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영예로운 천상 금메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내세 부활에 대한 강한 희망만 있다면 현세의 어떤 십자가도 달게 감수할 수 있다. 승리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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