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축일 강론
2016.03.07 17:03

2016-3-8-사순4주 화(에제47,1-12; 요한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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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4주 화(에제47,1-12; 요한5,1-16)

 

 

성경에서 예수님의 병자치유사건은 당신의 생명을 선물하시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곧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병자치유를 하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거나 “구원받았다”고 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다. 베짜타는 자비의 집 혹은 양의 집이라는 뜻이다. 수많은 병자들이 주변에 누워 있다가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서 목욕을 하면 낫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38 년 된 중풍병자가 오랫동안 기다려왔지만 아무도 거들어주지 않으므로 기회를 놓치곤 하였다.

절망상태에서 주저앉아있는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신다. 인생막장에 처한 사람에게 주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내가 너를 고쳐주기를 원한다”는 주님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38년이라는 세월은 우리 인생을 나중심의 불구자적 생활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출애굽과정에서 불신의 세월 40년에서 2년을 감한 숫자,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자부해온 유다인들의 율법주의 신앙을 상징한다. 중풍병자가 자기발로 물에 들어갈 수 없듯이, 율법주의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에 죄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뿐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를 치유해줄 수 있다고 믿느냐?”만 물으신다. 그리고는 곧바로 “일어나 네 요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신다. 믿음을 확인하시고는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주님이시다.

물에 들어가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치유능력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화되는 것이다.”

38년간 의지하여 누워있던 요를 걷어들고 일어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의지해왔던 율법의 상징인 요를 걷어들고, 믿음으로 의화되는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걸어가라는 명령이시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장애물로서 이러한 자기중심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내게 있어 버려야할 요는 무엇인가? 지식이나 자기만의 주관적인 경험을 통한 편견, 아집 등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다. 이를 과감히 버려야 주님 뜻에 온전히 맡길 수 있다.

단순한 믿음, 자기를 비우고 설익은 지식을 백지화하는 용단이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하다. 사도 바오로는 “내게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나는 내가 아는 지식을 모두 쓰레기로 여깁니다.”하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율법학자로서 배운 풍부한 지식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된 것이 아니라, 크리스찬적 세례를 받음으로써 다시 주님과 교회를 위해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아는 모든 지식과 학식과 경험이 크리스찬적 세례를 통해 다듬어질 때 교회를 위해서나 주님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짜타 물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신 분 즉 치유능력의 성령을 보내신 분이며, 창조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 앞에 계시니 중풍환자를 물에 넣을 필요도 없이 말씀 한마디로 일어나 걷게 하실 수 있다.

1독서의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나온 물이 가는 곳마다 쓴물이 단물로 변하고 생물이 살아나고 식물이 번성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예언이다.

성전 오른편은 예수님의 늑방의 창 자국을 상징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심장의 찔린 상처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와 새 생명이 살아남을 의미한다.

또한 강물의 깊이가 발목까지 찼다는 것은 아직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음을 의미하고 무릎까지 찼다는 것은 좀 부자유스럽지만 아직은 내 맘대로 하는 생활이다. 허리까지 물이 차자 이제는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야 하고 내 맘대로 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길까지 차올라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을 때 헤엄을 치지 않고는 건널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물살에 맡기지 않을 수 없는 신앙생활 즉 내 뜻대로 살던 삶에서 점차로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삶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신앙의 성장과정을 성령의 물이 불어나는 것으로 상징화하였다.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까지 물이 차있는가를 점검하자.

발목의 신앙인가? 무릎의 신앙인가? 허리까지 찬 신앙인가? 혹은 완전히 성령의 물에 잠겨 내 뜻은 없고 오직 성령의 뜻만이 나를 완전히 지배하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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