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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4주일(해외원조주일)(예레 1,4-19; 1고린 12,31-13,13; 루가 4,21-30)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 고 하였다. 왜 그럴가?

세상 사람들은 자기 고을에서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나오면 환영을 하고 자랑을 하지 않는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은 자기고을 주민들을 위해 도로포장을 해주거나 주택개량을 해주거나 고속도로계획을 마을 인근으로 끌어온다든가 등등의 현실적인 이익을 주니까 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언자는, 주민들에게 질책하고 잘못 산다고 충고나 할뿐 현실적인 이해관계와는 상관없기에 고향사람들은 그를 외면하고 박해를 가한다.

예레미아 예언자도 백성을 회개시키고 충고하니까 예언자의 말을 오히려 입에 쓴 양약과 같이 백성들의 비난과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예언자는 감옥에 갇히고 박해와 고난 속에 평생을 고달프게 살다가 생명마저 잃게 되었다.

예수님도 백성들의 원하는 바를 적당히 채워주면서 당신 일을 하셨더라면 인기와 명예도 얻어가면서 일생을 호강하실 수 있었을텐데, 예수님은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은 백성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가리지 않고 행하시니까 백성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백성들은 빵과 명예와 권력을 좋아했다. 그래서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마도 바로 이것들로 예수님을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 모든 유혹을 물리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고 백성들을 감동시켰다. 그들의 고향에서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 예수님의 집안은 별 볼 일없는 초라한 지방에 불과한데 저런 인물이 나오다니 “개천에서 용났구나.”하는 질투심, 시기심도 일어났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천한 신분의 사람이라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그들의 눈을 멀게하여 예수님의 신적권능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들은 가파르나움에서 예수께서 행한 기적을 이곳 나자렛에서도 해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아니 자기 고향에서 먼저 행하지 않는데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예수의 신권에 대한 순수한 경외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과 심심풀이 구경거리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이 값싼 약장수의 마술이나 광대놀이일수는 없지 않는가? 하느님의 기적은 신앙을 이미 갖고 있거나 적어도 믿음의 지세가 갖추어진 영혼에게만 보여주신다.

엘리아시대에 하느님은 신덕 있는 영혼을 찾으시다가 팔레스티나 밖의 이방인 사렙다 마을의 과부에게 당신기적을 보여주셨고, 엘리사시대에 하느님은 당신백성 중에서는 신앙을 찾아보실 수가 없기에 시리아사람 나아만에게서 당신기적을 행하신다. 신앙은 하느님의 권능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 예수를 자기고향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도록 묶어 놓으려는 나자렛 고향사람들의 편협한 국수주의와 고립주의에 묶여계실 예수님이 아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영혼에게는 누구든 예수님은 찾아 기신다. 죄인이든 세리든 천한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가리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징벌을 받은 내용을 서슴없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유다인들에게는 커다란 모욕이 되었다. 그래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벼랑으로 끌고가 밀어 떨어뜨리려 한다. 세상은 올바른 소리를 싫어한다. “양약은 입이 쓰다”고 했지 않는가. 병을 고치고자 하는 겸손한 영혼만이 그 쓴 약을 먹고 병을 고친다.

예언자의 말은 달콤한 설탕 맛을 찾는 군중들의 입을 쓰디쓴 맛으로 휘집어 놓게 된다. 즉 조용한 삶에 안주하려는 군중들의 기호를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길로 방향전환 시키려는 불편한 존재가 곧 예언자이다.

진복팔단의 말씀은 세상을 즐겁게 의욕적으로 기쁘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에게 몹시 불편한 말씀이다. 영생의 묘약을 찾던 청년도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귀에 거슬려 결국 재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다.

우리자신에겐 어떠한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 내용은 좀 ( ) 속에 넣었으면, 눈에 안 띄었으면, 지워버렸으면 하는 대목은 없는지 성찰해보아야 하겠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불편하게 느껴지는 대목은 없는지?

오늘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전서 13장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테스트를 하신다. 이 시험에서 여러분은 몇 점이나 맞는지 채점해보자. 고전13장 4- 7 까지에서 주어는 사랑이다. 이 사랑을 “나”로 바꾸어 물어보자. 문제는 11문제이다. 하나에 10점씩 주게되면 110점 만점이 되는데 10점은 보너스로 드리자.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몇 점이나 나오는가? 내가 남을 위해 재산을 다 준다 하여도 또 내가 남을 위해 불속에 뛰어든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랑이 아니다. 없는 것을 어떻게 나눠주며 내 마음에 고갈되어 있는데 무엇으로 나눠줄 수 있겠는가?

성령의 은혜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샘솟게 될 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 성령의 작용은 사람을 어린이와 같이 만들어주고 젊게하고 기쁨과 사랑이 넘치게 만들어 준다. 이유 없이 기뻐지고 점잔빼던 샌님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든다. 이 사랑은 위의 문제를 만점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천국등용문에 합격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하느님을 거울에 비추어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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