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축일 강론
2006.01.27 14:12

2000년 2월 5일, 설 대축일-분명히 드러내야 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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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민족의 오랜 풍속에 따른 좋은 날이니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찬미 드리면서 오늘 하루를 기쁘게 지내도록 합시다.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 형제, 친척들을 기억하고 이 미사 중에 기도해 드리도록 합시다. 오늘 일반 가정에서는 돌아가신 부모 형제를 생각해서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차례를 지냅니다. 차례를 지낼 때 조상과 함께 먹는다는 뜻으로 먼저 조상에게 절을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바치고, 그 다음 자녀들이 모여서 그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육신 부모를 통해 우리의 생명을 받았으니까 조상과 함께 잔치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차례 풍속은, 미사 성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우리끼리도 서로 사랑하는 정신과 닮았습니다. 차례를 지내는 것은 조상들에게 화복(禍福)을 비는 것이니까 우상 숭배라고 해서 금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풍속으로 볼 때 국가 또는 가정을 중심으로 일치한다는 정신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분명히 몰랐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주교를 박해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교회에서도 차례를 지내는 것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만 민속(民俗)으로서 교우들에게 허락하였습니다. 한때 그 금령으로 인해 한국 교회에서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된 것이 현세적으로는 원통한 일이지만, 영신적으로는 강한 신덕을 드러낸 순교자들이 나게 된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고 우리들의 자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만큼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에 대해서 누가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따질 일은 아닙니다. 그때는 그 시대대로 교회의 장상들이 신앙을 위해 필요하다고 결정한 데 대해 순명한 것이니 하느님 대전에 잘한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금령이 해제된 것은 민족 복음화를 위해 더 열정을 쏟아서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니 또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가톨릭의 중요한 교리 중에 ‘성인의 통공’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인이라 하면 하느님 대전에 은총을 입은 사람을 말합니다. 천당의 성인 성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준비가 부족해서 연옥에서 보속을 받고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착히 살아서 연옥 보속 없이 바로 천당으로 갈 영혼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는 죽은 다음에 연옥을 거쳐서 천당으로 가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옥 영혼들과 현세에 사는 우리가 모두 은총 생활을 한다면 다 성인들이고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성인의 통공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천주교회에는 세 부분이 있습니다. 개선지회(凱旋之會), 즉 이미 승리하신 영혼들이 계시는 천당의 승리 교회(ecclesia triumphalis)가 있고, 그 다음에 단련지회(鍛鍊之會), 즉 하느님 대전에는 불완전하지만 천당에 가기 위해 보속을 하고 있는 연옥 영혼들의 정화 교회(ecclesia purificans)가 있고, 그리고 신전지회(神戰之會), 즉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에 힘쓰며 영신의 전쟁을 하는 순례 교회(ecclesia peregrinans)가 있습니다. 이 세 교회가 서로 돕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든든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에 보면 어릴 때 오라버니들이 죽었는데 천당에서 누구보다 동생인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생각하고 그 영혼들에게 전달을 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이들은 세상에서도 사랑을 많이 나누지만 천당에 가서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들을 더 먼저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 우리를 생각해 줄 천당의 성인 성녀들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연옥 영혼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도록 합시다. 이 성년에 전대사를 얻기 위한 기도를 매일하고, 그 외에도 성체조배,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등 기도를 많이 하면 은사도 많이 얻게 되는데, 이기적으로 자기 구원만 생각하지 말고, 불쌍한 연옥 영혼들,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해서 그 은사를 사용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집시다. 그 영혼들이 우리의 기도로 천당에 가게 되면 우리에게 고마워하고 우리를 위해 전달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도회에서는 성삼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성소가 시작될 때부터 특별한 약속 하에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면서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에 연옥 영혼들을 위한 미사를 정기적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주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말로 복을 빌어주라고 하여라.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 주시고,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면 내가 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민수 6,22-27)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론과 그의 자녀들이 제관으로서 백성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성소에 따라 제관직을 맡으면 그것이 비록 직업적 제관이라도 주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니 하느님은 그들의 기도를 특별히 들어주신다는 것을 신덕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또 구약성서에 보면 사무엘 예언자가 태어나기 전에 한나가 성전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대제관이었던 엘리는 육신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서 자녀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고 명오가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나가 엘리 제관에게 기도를 부탁하니까 하느님께서 엘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사무엘을 잉태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제관으로서 하느님의 성소를 받아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면, 본인의 성덕과는 관계없이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성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교우들이 사제에게 미사 예물을 바치고, 또 미사 예물을 못 바치더라도 기도해 달라고 청하면 사제들은 기도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수도자들한테도 기도를 청하는데 때로는 기도 예물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수도자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줍니다. 이것도 교회에서 내려오는 오랜 전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봉헌 생활을 하는 만큼 본인의 열심이나 성덕과는 별도로 우리의 성소에 따라 우리의 기도를 특별히 돌보아 주십니다. 어떤 사제가 은총 지위에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고, 열심하지 않으니까 미사를 청하면 은혜가 있겠나 하고 염려하는 교우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염려하는 정신이 옳다고 한다면, 그 사제가 열심하고 은총 지위에 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신 기도하고 대신 보속한다는 천주교회의 진리는 취소되어야 될 것입니다. 천주교 교리에는 본인의 성덕이나 은총이 부족하더라도 교회에서 제도상으로 공적으로 이행할 때는 그 기도에 대해 교회의 신덕으로 보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느 사제의 신덕이 부족하여 그 본인은 은혜를 못 받더라도 그로 하여금 사제로서 일하도록 교회가 맡겨 주었으니까 공적으로는 그를 신임하는 것입니다. 비록 열심이 부족한 사제의 기도일지라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도록 교회에서 보장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우들은 사제를 사제로서 존경할 수 있습니다. 사제의 생활에 대해 ‘저 신부가 부족하니까 어떻게 되겠나?’ 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 무너져 버립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원장이나 수련장, 분원장이나 소임장들이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지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때로는 꾸지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의 불신을 조장할 정도로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생활이 파괴됩니다. 이 점에 대해 특별히 유념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 믿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함으로써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속하듯이,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생명을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혈연 관계뿐 아니라 한솥밥을 나누어 먹는 것도 특별한 관계이고 인간을 위한 큰 축복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남남입니다. 우리는 부모가 다르고, 어릴 적 성장 환경도 다르지만 한 수도회 회원으로 불림을 받았으므로 영신적으로 특별히 가까운 인연으로 묶인 사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까운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끼리 누가 대우를 더 받느니 덜 받느니 하고 신경을 쓰거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은 단체 생활을 위해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좁은 사회일수록 이해 관계가 쉽게 피부에 닿으니까 그로 인해 다투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은 서로 관심이 많으니 남들 같으면 보통으로 넘길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심성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래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심성이 그런 만큼 그런 점에 대해서 더 주의를 기울이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의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6-2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남과 대립이 되니까 그 대립성을 먼저 없애야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마음을 열고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명심하도록 합시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형제 여러분,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겠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야고 4,14-15)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인간의 삶을 안개에 비유했습니다. 우리 동양에는 초로지인생(草露之人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아침 햇빛이 떠오르면 없어지는 풀잎 끝에 맺힌 이슬과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한때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서로 비교하고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상 일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사랑을 먹으면서 이웃과 사랑하는 관계를 맺어야 뜻이 있습니다. 자기를 반성하면서 어떻게 하면 남한테 부담을 주지 않고 남을 기쁘게 해주고 도와줄 수 있는지를 생각합시다. 바오로 사도께서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는다고 하셨듯이 우리의 의무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지 남에게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면 나도 사랑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남한테 착하게 하면 남도 나에게 착하게 할 것입니다. 원죄의 벌로 인간성이 손상을 입긴 했지만 하느님께 받은 인간 본성은 착한 본성입니다. 그래서 남한테 은혜를 받으면 받은 은혜보다 더 많이 보답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심성입니다. 죽은 뒤에도 은혜를 갚는다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 주시어 서로 돕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착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루가 12,36)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 지 우리는 모릅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죄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 실수했다면 즉시 통회 정개하여 은총 지위에서 살도록 겸손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배불리 먹는 것만 희망하지 말고, 영신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함께 기뻐해야 된다는 점에 대해 특별히 명심하도록 합시다. 한국 교회사 연구소에서 「교회와 역사」라는 잡지가 왔는데, “생각하고 바라고”라는 큰 제목 아래 “순교 정신과 사회 정의, 그리고 청빈한 삶을 자랑하며”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삼성암 주지가 쓴 글인데 참고될 것이 있을까 싶어서 읽어보았습니다. 이분은 천주교에 대한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았습니다. 이승훈 베드로가 동지사 편으로 북경에 갔을 때 그라몽 신부한테 영세함으로써 천주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과 기해 박해와 병인 박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우리 순교자들을 무척 존경하는 자세였습니다. 이분이 마산 결핵병원 안에 있는 관해사의 주지로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외출했다가 늦은 시간에 들어오는데, 벌건 연탄불이 저쪽에서 걸어오더랍니다. 이탈리아에서 오신 두 수녀님이었는데, 이 어두운 밤에 연탄불을 가지고 어디로 가시냐고 물어 보았더니 김상호라는 환자 방에 연탄불이 꺼져서 갈아주러 가는 길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환자는 자기가 아는 불교 신자였답니다. 한밤에 환자가 춥겠다고, 그것도 천주교 신자도 아닌 불교 신자 방에 연탄불을 갈아주러 가는 수녀님들을 보고, 교파를 초월하고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그 애덕 정신에 감복해서 바로 부처님의 무한 자비가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분들이 바로 수녀 옷을 입은 자비의 화신 관음보살이라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삶을 사신 예수님이나 프란치스코 성인, 다미안 신부님과 후코 신부님, 토마스 머튼 신부님 등을 큰 스승으로 삼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종교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며, 이것이 자기들 말로는 부처님의 뜻이고 천주교로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정신에 있지 외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세상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사회 정의 실현에 앞장서 온 대쪽같은 정신과 청빈한 수도 정신을 더욱 빛낸 한국 천주교회는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주기를 축원한다고 하며 글을 마쳤습니다. 교황님께서 이 성년을 지내면서 종교간에 마음을 열고 서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고 교황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 글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자극을 줄 만한 좋은 글이긴 하지만 한 가지 모자라는 점이 있습니다. 이 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이 빠져 있습니다. 아리우스주의도 예수님을 격하시켜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피조물 중의 한 피조물이라 했습니다. 그러한 정신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도 천주교를 칭찬하긴 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기 때문에 비판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스님의 말씀에는 불교나 그리스도교나 진리는 같다는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교황님 말씀대로 어느 종교든지 진리의 일부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독려하고 자비심을 베푸는 것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의 종교를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통해서 하느님 대전에 새로운 생명을 받아 재생의 은혜를 입었으니까 이 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이야기하고 주장할 것은 주장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지키면서 타종교를 존중해 주는 것이 가슴을 열고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지 주체성 없이 가슴을 열면 속화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열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덮어놓고 이 말도 좋다, 저 말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종교도 좋다. 우리도 천당 가지만 너희도 천당 간다. 너희와 우리는 하나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종교와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는 매를 맞든지 상을 받든지 바르고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개자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인성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천주성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부처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맹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예수님을 한 위대한 인간으로만 존경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전에 야훼의 궤가 불레셋군의 손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하면서 다곤 신전의 다곤 신 바로 곁에 잘 모신다고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다곤이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야훼의 궤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곤을 일으켜 제 자리에 세웠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다곤이 또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야훼의 궤 앞에 넘어져 있었습니다. 다곤은 몸통만 성한 채로 남아 있었고 부러진 목과 동강난 두 손은 문지방께에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겁이 나서 야훼의 궤를 또 다른 곳으로 보냈지만 옮기는 곳마다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얼른 되돌려 보내기로 했습니다.(1사무 5,1-12 참조) 이처럼 하느님을 우상하고 같이 공경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큰 모욕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훌륭한 인간으로 여겨 공경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신덕이 아니라 모욕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천주교 학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는 듯합니다. 심지어 남들이 천주교를 흉보면 같이 흉보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이 시대는 호교자들이 없다고 통탄하신 적이 있는데 정말이지 이 시대는 호교학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요즈음은 마치 친목계처럼 서로 돕는 것을 우선시하는 종교들이 있는데, 천주교 신자들도 신앙 생활을 하나의 취미처럼 생각하는지 그런 종교를 선호해서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마태 10,32-3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은 최고의 명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이 이치인데, 아무 뜻도 없이 살다가 죽으면 그야말로 새가 날아다니다가 하루아침에 뚝 떨어져 죽는 것처럼 아무 의미도 없이 허망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매력은 없습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전파하다가 그 증거로 자기 생명을 바친다면 영원한 생명이 계속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기쁘게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던 시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교회에 쏟아지던 때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전교를 안 해도 교우들을 박해하는 소문만으로도 전교 이상의 효력을 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면 착한 사람들이 다만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됨으로써 신앙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공주 황새바위 성지에 가보면 세례도 안 받고 순교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돌아다니며 구걸하던 사람인데, 황새바위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할 때 그 혼이 천당으로 기쁘게 훨훨 날아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래서 ‘나도 저 사람들을 따라 천당에 가야지.’ 하는 신덕이 박혀 천주교 교리도 모르면서 천주교 신자라고 하며 순교하기를 원했습니다. 관청에서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쫓아내면 다시 찾아가서 천주교 신자라고 우겨대니까 귀찮아서 죽여주었습니다. 그날 그 영혼은 틀림없이 천당에 갔을 겁니다. 우리는 아직 순교 정신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약해도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면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주교는 초성 교회이고 은총의 교회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은총에 따라서 살도록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고 수련시키고 훈련시켜야 합니다. 천주교회는 초성적 교회이고 은총의 교회라고 하는 신덕을 박아 주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황 데레사를 통해 가르쳐 주신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간주경을 보면 “우리나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희생 바친 기도 은혜로 천주성삼의 영광이여, 우리 마음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모든 순교자들의 마음과 같이 용맹스럽게 해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이해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용기를 잃습니다. 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자 하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천주성삼 시대입니다. 삼위일체 신심 시대입니다. 그런데 성부도 중요하고 성자도 중요하고 성령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제일 가까운 분은 강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연장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 생명에 가장 가까운 근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게 해주시는 안내자이시고 유일한 중개자이십니다. 우리는 성자께서 천주성삼의 한 분으로 성부로부터 파견을 받으시어 우리를 위해 구원 사업을 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덕을 어디서든지 드러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9-10)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939년에 친구와 함께 배를 타고 일본에 갈 때 그 배 안에서 어떤 미국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미국인이 우리에게 오더니 우리가 쓰고 있는 신학생 모자를 보고 동경 신학교에 다니느냐고 묻기에 우리는 한국 대구 교구의 천주교 신학생인데 한 달 동안 일본에 견학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나하고 같이 갔던 안 마가리오가 먼저 교리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사람은 목사로서 동경 장로교 신학교 교수였고,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분명했습니다. 이런 사람한테 짧은 지식을 가지고 섣불리 상대하면 손해 보기 일쑤입니다. 친구가 이야기하는 대로 듣고 있다 보니 친구가 더 이상 대응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서서 천주교의 진교사패(眞敎四牌)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즉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전래된 교회에 대해 설명하고 그리스도의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면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이분이 더 이상 반박을 못했습니다. 그래도 신학교 교수인데 즉시 개종하라고 할 수는 없어서 “예수님이 교회를 하나 세우셨지 여러 개를 세우시어 서로 비판하고 싸우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후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가 되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일치하도록 노력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면서 더 깊이 연구해 보시라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개종한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지 토론해서 이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남들한테 충분히 설명할 수 있도록 공부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막히는 점을 연구하고 배워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준비를 해야 됩니다. 내가 신부 되기 전 1941년 마지막 여름방학 때 위가 안 좋아서 대구 남쪽에 있는 비슬산에 가서 한 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인 김 알릭스와 교우가 주인인 하숙집에 머무르면서 비슬산 용현사에 약수를 마시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김 알릭스가 어떤 청년과 교리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이 청년은 경도에 있는 제국대학 불교과에 다니고 있는 스님인데 방학이어서 절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지만 밖에서 토론을 하니까 마음이 쓰여 잠이 안 왔습니다. 누워서 듣고 있다 보니 친구의 말이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탄생부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이 있다는 것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강론 중에도 드러난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부활 승천하셨다는 것과 교회의 역사와 초자연적 진리에 의해 이 모든 것이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행적에 그러한 증명이 있느냐고 하니까 이 사람이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주장해야 될지를 분명히 알아서 어디 가든지 그걸 내세워야 합니다. 나는 신부 된 후에 뭇쎄 주교 비서로 있으면서, 토요일과 주일은 대구 신암동, 범어동, 황금동, 수성3동, 파동 등의 공소를 맡아 다녔습니다. 파동은 너무 멀어 자주 못 가고, 신암동은 주일마다 가고, 다른 데는 번갈아 가며 한 번씩 다녔습니다. 황금동은 원래 서양 신부가 다녔는데 일본 경찰들이 스파이라고 하며 못 다니게 하니까 나한테 가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거기에 가기 전에 주교관 사무실을 통해 총독부에 포교소 설치 허가부터 받고 갔습니다. 황금동 공소에 가서 교우들에게 찰고를 받고 있는데, 전교 못 하도록 서양 신부를 쫓아 보낸 한국 형사가 와서 나에게 나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금동은 대구 수성 파출소 관할입니다. 나는 법적으로 처리할 부분을 다 처리했기 때문에 겁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잠깐 왔다가 돌아가야 하므로 나갈 여가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귀찮게 하기에 할 이야기가 있거든 들어와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들어오더니 교우들한테 시국 인식을 박아 주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 실제로 하고 있지도 않으니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 안 한다고 했습니다. 왜 안 하느냐고 하기에 “당신네들은 경관으로서 그런 일 하는 게 전문 직업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일은 당신들이 하고, 나는 천주교 신부니까 여기 와서 종교 진리만 가르쳐 주면 됩니다. 내가 내 할 일만 하고 가면 되지 왜 당신네 할 일까지 내가 맡아야 합니까?” 하고 반박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강하게 반박하니까 이 사람이 할 말이 없는 듯했습니다. “할 말 있거든 또 해보십시오.” 했더니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총은 일 분에도 몇 백 개를 만들 수 있지만, 군인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선 아들을 낳아야 하고, 그 아들을 적어도 20년은 키워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지금 일본 제국이 전쟁 중이어서 사상자가 많이 생기는데, 천주교에서 독신 생활을 한다는 것은 비국민적이지 않습니까?…” 교우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내가 중단시켰습니다. “우리 헌법에 엄연히 종교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데 어찌 남의 종교에 대해 그렇게 무식한 말을 하십니까? 어디 한 가지 물어 봅시다. 일본 군인들이 부인을 데리고 다닙니까?” “안 데리고 다니지요.” “아들을 낳으려면 부인이 있어야 하는데 왜 혼자 다닙니까?” “전쟁 중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전쟁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지금 전쟁이 가정 생활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이지요?” “예” “나는 성직자로서 영신적으로 진리를 증거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니까 영신의 전쟁이 한평생 계속 되기 때문에 한평생 결혼 안 하고 사는 것이 국가와 민족, 사회를 위해서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하고 장려되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이 형사가 여름 농번기에 대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한테 탁아소를 하나 위탁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니까 수녀들이 말을 못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보시오. 결혼 생활을 안 하는 수녀들한테 당신이 남자로서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소?” 하고 호통을 쳤더니 공소 회장은 내가 잡혀 갈까봐 겁을 내며 형사 뒤에서 눈을 껌벅껌벅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잡아가면 잡혀갈 작정을 하고 한참 동안이나 그 형사를 혼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하며 점심 대접을 했더니 그 후로는 다시 안 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덮어놓고 겁내고 욕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할 일을 다하면서 남한테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교만을 부리라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방위는 해야 되고, 우리의 진리를 바르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언제든지 움츠려서 겁만 내고 슬슬 도망가고 피하는 소극적 자세로는 전교를 못 합니다. 우리는 동정 지키는 사람들이니 사람한테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자기 본분대로 하느님 대전에 바르게 살도록 합시다. 정결을 못 지키는 사람들이 천주성삼 교의를 반대하고, 예수님의 천주성을 반대하고, 성모님이 천주의 모친이라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리고 성모님이 예수님과 공동 구속자이고 또한 우리도 예수님의 공동 구속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치 우상을 위하듯이 예수님 한 분만 치켜들고 떠들어대는 데에는 동조하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분명히 드러냅시다. 봉헌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참는 것이 봉헌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대립될 때 내 뜻을 버리고 하느님 뜻을 받드는 것이 하느님께 제사 바치는 것 아닙니까? 자기 뜻대로 다하고 싶어서 욕심으로 사는 것은 수도 생활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도 참을 때는 참아야 되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될 때는 해야 됩니다. 우리가 증거해야 될 것이 있으면 목에 칼이 들어오고, 매를 맞고 벌을 받더라도 증거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악한 표양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바리사이파의 악한 표양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대로 사시는데 바리사이들은 비뚤어진 자기 마음을 고치기 싫으니까 예수님이 잘못하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예수님한테 걸려 넘어져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리사이적 악한 표양은 예수님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통을 받더라도 진리를 증거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악한 표양은 어떤 행동이 정당한 것이라 해도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그 행동을 보고 못 알아들어서 걸려 넘어진다면 그것은 애덕을 거스르는 표양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하느님 대전에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학교에서는 대신학생들과 소신학생들을 따로 살게 합니다. 수녀원에도 식당이나 성당은 같이 쓰지만 서원 수녀들과 수련 수녀들의 생활 공간은 따로 있습니다. 갓 들어온 어린 사람들이 이해가 부족하여 잘못된 영향을 받을까 싶어서 조치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나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만큼 조심해야 됩니다. 세 번째는 진짜 악한 표양으로, 잘못 살아서 모든 사람의 걸림돌이 되며, 하느님 대전에도 심판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것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도망 안 가고 붙어사는 것만도 수도원에서 고맙게 여긴다 싶어 수도자인지 아닌지 구별 못할 정도로 생활하면서 남한테 대우받을 것 다 받으려고 하는 엉터리 수도자가 되지 맙시다. 하느님께 서약을 했으면 지키고 지키지 못하겠거든 스스로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겠다.”(야고 4,15) 하셨는데 이것이 겸손입니다. 앞날에 대해 보장받은 일도 없고, 보장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으면서 남들에게 자신만만하게 구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느님 대전에 꾸밈없이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공연히 남의 눈만 피하는 이중 생활을 하지 맙시다. 때로는 분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에 떨어지지는 않으셨지만 마귀의 유혹을 당하기는 하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살 동안 때로는 유혹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언제든지 겸손하게 기도합시다. 한 번 해서 안 되거든 두 번, 세 번, 거듭거듭 노력합시다. 조각가가 처음부터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루에 안 된다고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하느님 뜻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을 겸손히 행하도록 합시다. 남의 눈을 속이는 이중 생활을 하지 말고 할 말이 있거든 합시다. 그러나 다른 사람한테 분심을 준다든가 어린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고해소에서 하거나 자기를 지도해 줄 만한 사람한테 해야 합니다. 사회 생활에서나 신앙 생활에서나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도 생활에 있어서 분별력을 가지고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을 입어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성소길을 잘 걷도록 새로이 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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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주일, (대)축일 강론 2013-12-1-A해-대림제1주일(이사2,1-5; 로마13,11-14; 마태24,37-44) Stephanus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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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주일, (대)축일 강론 11월 11일-투르의 성 마르띠노 주교기념 Stephanus 20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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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주일, (대)축일 강론 11-9-요한 2,13-22: 라테란 대성전 봉헌축일 Stephanus 2013.11.08
179 주일, (대)축일 강론 11월 4일-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Stephanus 2013.11.03
178 주일, (대)축일 강론 2013-11-3-C 해 31 주일 Stephanus 201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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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주일, (대)축일 강론 10월 28일-성시몬과 성 유다(타대오)사도 축일 Stephanus 2013.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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