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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포교 사업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입니다. 원래는 12월 3일인데 금년은 12월 3일이 대림 첫 주일이기 때문에 하루 앞당겨서 오늘 지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포교 지방에 살고 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우리 모두의 주보 성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이 나와 프란치스코 본명을 가진 회원들의 본명 축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자기 주보 성인 축일을 따로 지내지 못하니까 수도회 대표자 한 사람의 축일에 우리 모든 회원들이 자기 수호 성인을 생각하면서 공동으로 지내는 것이 오늘 축일의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11월 19일에 태어나서 12월 16일에 뚜르너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본당 신부님이 생일과 가장 가까운 주보 성인을 찾다 보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본명을 지어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보 성인을 정하는 것은 각기 그 성인을 본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까 그 성인께 대한 신심을 우리가 가질 수 있고, 또 하느님께서 그 성인의 전달을 받으셔서 그 성인을 본받는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 당신이 포교 사업에 전력을 다 기울이지만 하느님 대전에 자랑할 것은 못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간택되어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것이므로 자기는 순명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일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시켜서 하는 일이니까 자기를 자랑할 것이 없고 다만 자기 노력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영광과 찬미를 받으셔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기적적으로 하느님께 매를 맞고 마음을 바꾸게 되었으니까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깊이 잘 생각해 보면 사도 바오로뿐 아니라 모든 성소가 다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은 자기가 원해서 수도원에 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날이 갈수록 나는 내가 이 성소를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쓰시려고 선택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 능력을 드러내기보다 하느님께서 무능한 사람을 이용하셔서 당신이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으로, 나는 단순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선택된 것이라는 것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을 위해 우리가 물질을 준비하는 데도 힘들지만, 물질로 인해 우리가 정신 고통도 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시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반대 받고 고통 받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당신 사업을 위해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이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 영광이고, 우리 차지는 고통을 받더라도 하느님을 위해 원망 없이 겸손하게 잘 참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당 가서 공로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오상 공로이고, 거기에 좀 보태어지는 것이 예수님께 대한 신덕과 사랑으로 받는 우리의 고통에 대한 상급이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셨으니, 자기의 뜻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하느님의 뜻만 따르는 것, 이것이 우리 수도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잘 들어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루가 12,8-10)라고 하셨듯이 우리는 사회 권위 앞에서나 교회 권위 앞에서나 우리의 신덕을 바로 드러내야지 비겁하고 용기 없는 신앙으로는 수도원을 끌고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 수도회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게 된 데는 이웃의 도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길을 통해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내 노력이 아니라 전부 하느님 은총으로 되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돈이 없어서 고통을 사고 있으니까 공중에서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들렸는데, 맞지 않습니까? 우리 수도자들이야 백만장자가 부러울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 사업에 우리 몫은 희생과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희생과 기도를 받으신 후에 협력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업에 협력자들이 자발적으로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좋은 지향을 가진 협력자들 덕분에 하느님 사업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도회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와주신 은인들에게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도록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면서도 참으셨습니다. 매를 맞고 조롱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아도 참으셨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으신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시고, 그 고통을 인류의 죄를 배상하는 뜻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지 않았습니까. 나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신부가 되었으니까 고통을 참고 바쳤습니다.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 사람들이 무어라고 비판하든지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고통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데 있어서 우리한테 은총이 된다는 것을 믿고 고통을 잘 참는 것이 우리의 첫째 마음 준비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 수도자들은 명예심을 버려야 됩니다. 수도원이 속화되는 것은 바로 이 명예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성소와 자기의 인간적 이해 관계를 저울질하는 사람들입니다. 이해 관계는 인간의 세 가지 기본 욕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첫째는 물질에 대한 욕심입니다. 물질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축복입니다. 성소 받는 사람들은 물질의 욕심을 버리고 아무 걱정 없이 삽니다. 전에 서울에 사는 어떤 할머니가 굶어 죽었는데, 그 집에 가보니까 한 자루 소복이 모아 둔 화폐가 나왔답니다. 어떻게든지 물질을 갈퀴로 모아 두었다가 늙어서 고생 안 하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아까워서 돈을 못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욕을 끊고 욕심을 안 부리는 것이 청빈덕입니다. 두 번째는 정욕입니다. 정욕은 남녀 관계뿐 아니라 부모 형제에 대한 지나친 애정도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성직자들이 부모 형제를 가까이 하면 육정 쓴다고 남들한테 손가락질을 받으니까 주의하는데 요즈음은 부모 모시고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신부는 가정을 가지지 않아야 교우들하고 한마음 한뜻이 되는데 부모 형제를 모시고 따로 살면 성직이 직업처럼 되어 버릴 것입니다. 교우들하고 사이가 멀어지고, 교우들한테 신임을 못 받고 사랑을 못 받습니다. 그리고 친구끼리도 너무 지나치게 서로에게 매여 자기 성소길에 손해를 본다면 그것도 옳지 못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성의 친구 때문에 남한테 비판의 대상이 되고 성소길에 분심을 가지게 된다면 더더구나 안 될 일입니다. 순명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는 순명 정신으로 그 질서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서로 협력하는 것도 순명입니다. 모든 것이 순명의 정신으로 이루어집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있는 우리는 힘을 합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므로, 우리의 힘을 모으는 데 순명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순명 정신이 있을 때 서로 일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하나가 되라고 네다섯 번 이상이나 거듭 부탁하셨습니다. 공동 생활에서 자기가 옳다고 자기 주장만 한다면 항상 시끄러울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덕을 드러내야 할 때 남들과 의견이 다르다면 혼자서라도 주장하여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엘리야나 다니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 자기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면 잘 봉헌하고, 우리가 인사를 듣게 될 때는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고 우리가 차지하지 맙시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짓지 말아야 됩니다. 모든 죄의 근본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느님을 따릅시다. 자기의 인간적인 이해 관계를 따지지 말고 온전히 하느님 사람이 되도록 오늘 미사 중에 특별히 하느님께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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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대)축일 강론 (2000년 12월 2일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 창립자 신부님 2005.12.03
2317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1-3-예수성명-(요한1,29-34) Stephanus 2015.01.02
2316 주일, (대)축일 강론 1-3-예수성명-(요한1,29-34)-주의 공현전 금 Stephanus 2014.01.01
2315 주일, (대)축일 강론 10-15-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 기념 Stephanus 2013.10.14
2314 주일, (대)축일 강론 10-15-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 기념 Stephanus 2014.10.14
2313 주일, (대)축일 강론 10-16-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꼭 기념-예수성심공경-성시간 Stephanus 2013.10.14
2312 주일, (대)축일 강론 10-16-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꼭 기념-예수성심공경-성시간 Stephanus 2014.10.15
2311 주일, (대)축일 강론 10-16-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꼭 기념-예수성심공경-성시간 Stephanus 2015.10.15
2310 주일, (대)축일 강론 10-17-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 Stephanus 2013.10.16
2309 주일, (대)축일 강론 10-17-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 Stephanus 2014.10.16
2308 주일, (대)축일 강론 10-17-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 Stephanus 2015.10.16
2307 주일, (대)축일 강론 10-18-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Stephanus 2013.10.16
2306 주일, (대)축일 강론 10-18-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Stephanus 2014.10.17
2305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10-21(29주-월)-루카12,13-21-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Stephanus 2013.10.20
2304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10-22(29주-화)-루카12,35-38-충실한 종 Stephanus 2013.10.21
2303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10-23(29주-수)-루카12,39-48-준비된 마음 Stephanus 2013.10.22
2302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10-24(29주-목)-루카12,49-53-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Stephanus 2013.10.23
2301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10-25(29주-금)-루카12,54-59-시대의 징조 Stephanus 2013.10.24
2300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10-26(29주-토)-루카13,1-9-회개의 촉구 Stephanus 2013.10.25
2299 주일, (대)축일 강론 10월 1일(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대축일) 관리자 201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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