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5.09.25 17:31

2015-9-26-25주-토-즈카2,5-15; 루카9,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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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즈카2,5-15; 루카9,43-45

 

오늘복음전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놀라서 감탄한다. 무슨 행적인가? 오늘 복음 전에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변모사건이 있었고, 그 다음날 간질병 걸린 어린이를 고쳐주신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오늘 복음과 같이 당신 수난에 대해 예고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렇게 엄청난 기적을 행사하시는 권능을 지니신 메시야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수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말씀 속에 감추어진 현의를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제자들과 군중들의 메시아관은 현세적으로도 개선장군처럼 승승장구하여 그들의 답답한 마음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메시야이길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메시야관을 고쳐주시고자 미리 여러 차례 당신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군중들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십자가의 신비와 수난의 신비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중에서 가장 상상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메시야는 당신 구원사업을 이루셨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전능을 지니신 분이 인간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사람이 처형되는 십자가에서 당신 구원사업을 이루셨다는 것은 역사상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누군들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성경에는 이를 이미 예언해 놓았다.

즉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52-53장에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이 십자가의 수난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을 예언하였다. 신약에서는 시메온 예언자도 그리스도를 반대받는 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성경을 읽고 또 읽어도 깨닫기는 못하고 또 막상 눈 앞에 닥치게 되니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수도생활에서도 복음 3덕의 소중함이나 의미에 대해서 배워 알고 있어도 현실에 부딪쳐서도 참다운 봉헌을 못하고 우선 눈 앞에 보이는 물질에 대한 애착을 갖기가 쉽고, 피조물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에 흐르기 쉽고, 본성적인 자기 주장이 앞서 내 멋대로 하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한다.

제자들이 십자가의 현의를 깨달은 것은 언제인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이다.

베드로는 고기잡이하다가 주님을 뵙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 주십시오.”하고 물속에 뛰어들었고 다락방에 모여 있던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락방에 나타나셨을 때 그 제야 감동적으로 주님을 알아 뵈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주님과 나란히 걸으며 말씀을 듣고서야 뜨거움을 체험하였고, 빵을 나눠주실 때에야 비로소 결정적으로 알아 뵈었다.

그러나 토마사도는 지각생으로 맨 뒤에 자기 손가락을 주님의 뚫린 손과 발과 늑방에 넣어본 후에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고백했다.

우리도 수도생활 중에 깨달음의 시기가 다소 빠르고 늦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려 주신다. 베드로와 토마사도의 깨달음의 시차는 있지만 깨달은 후의 봉헌은 같다. 두 분 다 주님을 위해 순교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은 주님의 현의를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뛰쳐나가 주님을 배반한 유다스에게 있었다.

그는 불행의 주인공이다. 그렇다고 유다스의 오판에 다시 개전의 기회가 없었던가?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30은전에 스승을 팔아넘기고도 아직 늦지 않았다. 성모님도 유다스에게 통회하고 주님께 돌아서기를 권유했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시선은 뒤를 돌아다 보시며 유다스를 찾고 계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유다스의 배반은 큰 죄이다. 그러나 더 큰 죄는 통회하지 않은 마음이다.”.

예수님의 늑방을 창으로 찔렀던 론지노도 통회의 마음으로 주님의 용서를 받아 후에 교회 안에서 주교가 되고 성인이 되었다.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무덤에 내려가는 게단 위에 우뚝 서있는 상이 바로 창을 들고 서 잇는 론지노 성인상이다.

우리도 인간이기에 가끔 실수에 떨어지곤 한다. 우리는 실수에 떨어졌을 때 그자체로 실망하지 말고 통회에 더딘 자신의 현재의 마음을 탓하자. “아직은 늦지 않았다. 일어나 주님께 나아가자.”고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고 마음에 통회의 마음을 일으키자.

 

1독서의 즈카르야서는 천사가 측량줄로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폭과 길이를 재고 있다.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 성을 둘러치지 않고 살게 되리라.”고 하신다. 이렇게 유다인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 구원관을 설파한다.

이스라엘은 신민의식, 바리사이적 배타주의를 지니고 있는데 반해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해 만민구원의지를 표명하시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요엘서3,1내가 너희 만민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리라.”고 하는 만민구원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듯이 장차 예루살렘이 만민이 긷들이는 구원의 구심점이 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수도 시온아! 기뻐하며 노래하여라. 이제 내가 네 안에 머물리라. 그날이 오면 많은 민족이 주님의 편이 되어 그의 백성이 되리라.”하는 메시아 시대가 오면 모든 민족이 구원의 대상이 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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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수난예고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다. 첫 번째는 마태16장에서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수여하신 자리에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가로막으며, “맙소사,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하였다가 에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두 번째 수난예고는 오늘 보금처럼 타볼산의 현성용 직후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지난번처럼 말대꾸하였다가는 또 야단맞을까봐 슬퍼하면서도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다. 세 번째 수난예고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이다. 즉 수난하러 올라가시는 도중에 마지막으로 수난예고를 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비는 세상 사람들이나 제자들과 같이 힘의 논리리가 아니라, 사랑의 논리이다.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의 논리대로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행하셨다면 세상의 군주들을 제압하고 강력한 군주로서 정의를 실현하는 사회혁명가가 되어야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논리는 힘없이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죽으시리라는 사랑의 논리이다. 이러한 괴리를 벗어나 언제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의 신비를 깨닫게 될까?

예수님 부활 후 다락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을 방문하셨을 때 그들은 기뻐하며 깨닫는 듯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잠시 나타나셨다가는 사라지시니 그들은 또다시 불안해졌다.

예수님이 3번째 찾아가셨을 때 그들은 또다시 고기 잡으러 옛 직업으로 돌아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에야 비로소 십자가의 신비 곧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실천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들도 순교로 열매 맺는 용감한 십자가의 전달자들이 된다.

9월 순교자성월을 마감하는 시기에 성 아우구스티노의 다음 말씀을 상기하게 된다. “순교자 앞에서는 정덕도 그 빛을 잃는다.”

순교는 정덕에 우선하는 최상의 덕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순교는 사랑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신비, 사랑의 신비는 버섯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나무에는 버섯이 나지 않는다. 죽은 나무 등걸에서 버섯이 피어난다.

내가 죽을 때 사랑이란 버섯이 피어난다.

사해바다에서는 헤엄을 치지 않아도 몸이 둥둥 뜬다. 내 인간본성의 물이 죽어 농도 짙은 짠물이 될 때 하느님이 본래 박아주신 아름다운 품성이 수면위로 떠오른다.

오늘 1독서 에제47장의 성전오른편에서 흘러나온 물이 가는 곳마다 죽은 생물을 살려내고 열매와 과일을 풍성하게 맺는 새로운 세상을 창출해 낸다고 하며, 하느님은 강물을 건너가라고 명하신다.

천척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물이 발목에 찼다. 아직은 내 힘으로 걸어갈 수 있다. 물이 무릎까지 찼을 때도 약간 장애를 받기는 하지만 내 힘으로 건너갈 수 있다. 허리까지 찼을 때도 내 힘으로 건너가려고 바둥대며 건너간다. 그러나 목에까지 찼을 때 이미 건널 수 없게 된다. 하느님 은총의 바다에서 내 힘에 의지하려던 마음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느님은총에 의탁할 때 하느님은 비로소 일하신다. 하느님은 이때까지 기다리신다.

사랑은 내 힘과 의지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꽃과 같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리 해도 못 다하는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했다.

넘어질 때마다 붙잡게되는 말씀이 있다.

베드로가 스승을 배반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어

너 나를 사랑하느냐?”3번에 걸친 질문이다.

그만큼 실천하기 힘든 것이 사랑의 실천이요, 넘어지기 쉬운 것이다.

내가 본성에 죽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1요한3,8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했고,

1요한3,25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고 했다.

나의 가장 취약점인 사랑실천에 넘어질 때마다 주님과는 너무 거리가 먼 자신을 돌아보며 이 말씀 붙잡고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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