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축일 강론
2015.09.20 21:11

9월 21일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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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

 

다른 복음사가들은 마태오에 대한 존경과 세심한 배려 때문에 마태오의 별명인 레위라고만 소개하지만, 마태오 자신은 자기 자신을 세리 마태오라고 뚜렷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보고 예로니모 학자는 이것은 어떠한 신분의 사람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마태오는 이와같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새사람이 된 것을 더욱 기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부르시자, 그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그동안의 예수님의 기적은 부르심을 받은 자가 즉시 따라나서기에 충분하리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매력적인 존재요 감화를 주었던 것입니다. 자석이 쇠뭍이를 끌어당기듯 창조주가 피조물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니신 것입니다.

마태오는 감사의 표시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였습니다. 마태오가 세리직을 떠난다고 하니까 아쉬워하는 동료들과의 석별을 고하는 회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들 주에는 세리와 죄인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점을 노리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어옵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거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예수님은 의사로 오신 것입니다. 의사 앞에서는 병자라고 인정하고 환부를 드러내 보이는 사람만이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겐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도 아무 효험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리나 창녀나 죄인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고 새사람이 됩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 에페소서4,1-13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주님도 한분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게 각각 다른 은총을 알맞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구성원으로서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며 자기직분에 충실하여야할 것입니다.

세리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단에 입적되는 영광스러운 날 주님은 우리 각자를 찾아오시어, “나를 따라라.”라고 권유하십니다.

죄인인 세리 마태오가 자기 집에 식사초대 하여도 주님은 기꺼이 응하셨듯이 우리마음이 비록 죄스럽고 부당하게 느껴져도 주님을 맞아들일 마음만 되어있다면 주님은 기꺼이 우리마음에 오십니다. 그분은 의인을 구하러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유다인들이 손가락질 하는 죄인도 불러서 복음사가로 훌륭히 키워 쓰십니다. 마태오복음 첫머리에 주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족보에 유난히 죄녀들 4명이 언급됩니다. 창녀 라합,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한 타마르, 이방인 모압 여자 룻, 다윗과 간통한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 등을 언급한 마태오 복음사가는 죄인을 구하러 오시는 주님을 죄녀들의 혈통에서 이끌어내시고 다만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라는 방패막이로 주님을 보호하시어 구세주를 죄로부터 보호하시는 섭리를 소개하면서 마태오 자신도 죄인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죄사함 받고 의화 되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의기소침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구하러오셨고 영신적인 의사이십니다. 용기를 내어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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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복음에 나오는 마태오를 보자.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오를 주님께서 부르시자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따라 나섰다. 그리스도의 명성에 대해 이미 들어왔고 평소에 흠모하였음이 분명하다. 직장에서 사무를 보다 말고 즉시 따라 나선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미리부터 마음에 결심이 서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은 성소를 받으려면 몇 달씩 뜸을 드리고 요리조리 생각해보고 계산하지 않는가? 그러나 오늘날 성소받는 일은 그리스도 당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에 비하면 휠씬 수월한 것이다. 그리스도 당시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시는 그리스도, 가는 곳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 의해 반대와 모함을 당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너무도 위험부담이 컸을 것이다. 오늘날 수도원은 의식주문제가 해결되고 고상한 수도복에 소임 역시 고상한 수도자의 본분에 합치되는 일만하니 아무런 위험요소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소를 받기 위해 몇 달씩 고민하며 망설이는 오늘의 세대는 주님의 제자들 앞에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가 세리직을 떠난다고 하니 동료세리들이 모여 송별연을 베푼다. 여기에 예수님이 초대되었다. 그러자 바리사이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어온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요?

여기서 죄인들이란 세리의 대명사이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사회에 섞일 수 없었고 공중 앞에 나설 수도 없었다. 바리사이파사람들은 영신의 의사인 그리스도 앞에 이와 같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은 의인이라 자처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완고하고 어두운 마음을 안타까와 하신다.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필코 구원을 얻고자하는 열망이 없다.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며 죄가 없다고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말씀처럼 성당에 들어가, 보라는 듯이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하고 자기자랑을 늘어놓았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어리석은 자이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이것이 진짜 기도이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진실된 기도이다.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로 이 세리였던 것이다. 스스로 의인임을 자처했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실제로 거부하고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유도하였다. 복음에서 많은 죄인 세리 창녀들이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고 참삶의 광명을 찾은 예가 많다.

첫째로 세관장 자캐오는 그리스도를 만나 새사람이 되고는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착취한 것은 4갑절로 갚아주겠다고 하였고,

둘째로, 일곱 마귀에 시달리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를 만나 새사람으로 변화된 후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주님 머리에 부어드리고 회개와 감사의 눈물로 발을 닦아 드렸다.

셋째로,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크나큰 용서의 체험으로 죄인이 새사람으로 변화하는 감동적인 내용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왜 복된 소식인가?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 새 생명을 얻고 새사람이 되었으니 복된 소식이 아닌가? 육신병을 고친 것은 오히려 작은 것이요, 영혼의 병을 치유한 것이 무한히 큰 은혜인 것이다. 이 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는가? 재물로도 돈으로도 어찌 새 생명 곧 영생의 길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영혼의 의사인 그리스도를 만나면 새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을 두 부류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스스로를 의인으로 착각하는 진짜 죄인과, 둘째로 스스로 죄인이라 자처함으로써 그리스도로부터 의롭게 여김을 받는 의인의 두 종류의 사람이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도취에 빠져 자기죄가 안 보인다.

외인들을 보고 회개하라고 하면 내가 사람을 죽였느냐, 남의 재물을 훔쳤느냐,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졌단 말이냐고 반문한다. 먼지가 많이 낀 거울에는 티끌이 잘 안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맑은 거울에는 작은 티끌만 앉아도 선명하게 잘 드러난다.

옛 성인성녀들은 자신을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명경지수처럼 갈고 닦은 양심거울에 작은 티끌이나 마음에 걸리는 작은 허물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어 견딜 수 없어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고백성사를 1020년씩 미룬 냉담자는 오히려 죄목이 간단하다. 별로 생각이 안난다. 다 잊어버렸고 양심거울에 때가 끼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은 한 달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도록 권장하는데 수도원에서 무슨 그리 큰 죄가 있겠는가? 그러나 고도로 양심생활을 하는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양심에 걸리는 일은 작은 것도 크게 보이기 때문에 월 1회 닦아내어야만 시원한 것이다.

우리가 죄인임을 시인할 때에만 영신의 의사인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실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죄가 없다고 잡아땐다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 계셔도 속수무책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시고 나는 의인을 구하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비결은 역설적이지만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할 때이다. 사실상 하느님 앞에 죄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라는 고백과 같다. 우리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때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네 죄가 진홍색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주고 네 죄가 다홍색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게 하리라고 약속하시며 그뿐만 아니라 네죄를 내가 기억조차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신다. 문제는 하느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편에 있다.

자수하여 광명찾자! 반공표어 같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도 이 표어가 적절하다. ''란 단어는 과히 좋은 어감이 아니나 죄 고백으로 입게 되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 참으로 반가운 단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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