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8주일(집회 27,4-7; 1고린 15,54-58; 루가 6,39-45)

by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posted Oct 3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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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참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의 결점을 바로잡기에 앞서 자기의 결점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는 자기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을 티를 발견하고 쉽사리 단죄한다는 것이다. 들보는 지붕을 바치고 있는 나무다. 기둥을 가로질러 천장의 무게를 견뎌야 하기에 크고 튼튼한 나무이다. “제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꺼내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그런데 사실상 그런 일이 우리 안에서 무의식 중에 일어나고 있다. “내가 잘못 하면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남이 잘못하면 대죄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잘못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분노하며 매몰차게 단죄하기 쉽다.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것은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고 남 뒤에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주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먼저 내 눈 속의 들보를 빼내어야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도 잘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 눈 속의 들보가 자칫 남의 눈 속의 티를 침소봉대하거나 남의 눈 속에 들보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내 눈안의 들보를 빼내는 것인가? 인간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야누스적 존재이다. 그래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을 재는 잣대와 남을 재는 잣대라는 서로 다른 눈금을 가지고 있는 두개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 잣대의 눈금은 듬성듬성하고 남을 재는 잣대는 매우 잔 눈금이 촘촘이 박혀 있다. 그래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 “내가 시간에 늦으면 사정이 있어서이고, 남이 늦으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단죄한다. 그러니 들보를 빼내는 작업은 간단하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잣대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을 보는 시각과 자신을 보는 시각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는 않다. 어렵기에 참고 희생해야 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서 파견받으시어 죄많은 인간세상에 오셔서 우리 눈의 들보를 찾아내어 지적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한 사람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숱한 허물에도 불구하고 참아주시고 단죄하기 보다는 축복해 주심으로 새로운 삶에로 인도해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조건없는 사랑이다. 주님의 사랑을 깨들은 사람은 남의 눈의 티도 보지 않으려 한다. 평생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슬픈 운명인가?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무엇이 좋은 나무인가? 건강한 뿌리를 가진 나무이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흙속에 묻혀있는 뿌리가 건강할 때 좋은 나무로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말은 참으로 중요하다. 말에는 일종의 큰 힘이 있어서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성서에도 “매에 맞으면 맷자곡이 날뿐이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고 했고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 많지만 혀에 맞아 죽은 사람은 더 많다”(집회 28,17-18)고 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안다. 말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서는 말에 대한 여러가지 교훈을 들려주고 있다. 말은 인격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신중해야하고 남을 살리고 격려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일컬어 ‘말씀’이라고 한 이유도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위험 중에 잇는 영혼들을 당 신 말씀으로 구하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판단하는 것이 된다. 내 눈에는 그가 부족하게 보이나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더 부족한 사람일 수 있고 그가 설혹 부족하다해도 하느님께서는 그 자체를 사랑해주신다. 판단은 실로 하느님의 몫이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해서도 안되지만, 또 해야 할 말은 해야 한다. 전도서에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도 있다”고 했다. 성모님의 혼전 잉태를 알게 된 요셉의 침묵은 성모님과 태중의 아들 예수님을 살리는 역할을 했고 천사의 영보에 대한 성모님의 “예”라는 응답은 말씀을 세상에 낳아주는 위대한 힘을 발휘하였다. 요셉성인의 침묵을 금이라고 한다면 성모님의 응답은 다이아몬드격이다. 요즘은 말로서 말많은 세상이다. 내 인격을 말로서 다듬어야 하겠지만 남의 인격도 말로써 도와주어야 한다. 말이 곧 ‘말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을 삼가고 가려서 하되 필요한 말은 하되 가려서 절제 있게 해야되며 필요없는 말이나 남을 해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