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5.05.19 08:25

2015-5-19-부활7주 화-사도20,17-27; 요한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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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7주 화-사도20,17-27; 요한17,1-11

 

오늘 복음인 요한 17장은 대사제의 기도이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살려고 태어나지만 예수는 이 세상에 죽으시기 위해 태어나셨다. 아버지께서 그분을 파견하신 목적은 그분이 인류 죄를 대신 보속하기 위해 대신 죽어주시는 사명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명하시면서 그 일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하시며 그 때가 다가왔다고 기뻐하신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당신 안에 계시다는 것은 결국 아버지와 당신이 한분이시라는 논리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합일의 단계이다. 제자들도 바로 이 합일의 단계에 이르기를 갈망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하느님과 합일의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을 영성신학에서는 정화-조명-일치의 단계로 설명한다. 정화과정은 하느님과의 불일치의 원인인 죄와 그로 인해 하느님과 이질감을 느끼게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을 느끼도록 사탄이 유혹하는 실망과 좌절의 상처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다.

조명의 단계는 주님의 빛을 통해 하느님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하는 단계요, 일치의 단계는 하느님의 모상인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죄로 일그러졌던 영혼의 본모습을 회복하여 하느님과 하나되는 과정이라할 수 있다.

여기서 일치의 모범을 보이신 바오로 사도의 회심과정과 주님과의 일치과정을 살펴보면 나의 인생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 바오로사도의 신앙역정

사도 9장 바오로사도의 다마스커스의 회심을 통해 사흘간 눈이 안보이다가 하나니야를 만나 성령의 도움으로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죄성의 비늘이 벗겨지고 그릇된 신관의 비늘이 벗겨지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그의 신학의 핵심인 의화론을 전개하는데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약의 중추적인 신학적 깨달음에 도달한다. 성령의 빛을 받아 하느님의 구원신비에 대한 조명의 단계를 체험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다음으로 자아의 아성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갈라2,20)하느님과의 합일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주님은 하나니아에게 주님이 바오로 사도가 장차 예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할지 보여주겠다고 하시며, 오늘 독서에서 예루살렘에서와 같이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하라고 권면하신다.

평소에 로마를 거쳐 그 당시 땅끝이라고 생각되었던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던 그가 주님의 말씀대로 로마에 가서 자유로운 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체포되어 영어의 몸으로 로마에 도착하여 법정에서 증거하게 될 줄이야 어찌 상상했으랴!

그가 겪은 고난의 역정은 고린토 후서 11장에 열거하듯이 갖은 수고와 매질 옥살이, 죽을 고비, 채찍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민족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

그러나 칼에 순교할 때 잘린 목이 세 번 튀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하여 목이 튄 곳마다 샘이 터져나와 Tre Fontana라 하지 않는가?

전생애를 전번제물로 봉헌하여 몸과 마음을 완전연소시키신 불같이 뜨겁고 정열적인 성인이셨다.

최근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이 앞으로 살날이 살아온 시간보다 짧다는 생각에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하면 주님영광을 위해 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살아갈까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내 중심으로 살아왔던 삶에서 주님 중심의 생활 즉 주님의 뜻을 찾으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만을 찾고 환경을 탓하지 말고 자신이 변화되어 환경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읽도록 노력하려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죄는 몸서리치며 마귀를 즐겁게 하는 일은 다시는 하지말자고 맹서해본다.

원수마귀에게 선전포고하며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주님의 사제로서 마귀권세를 처부술 권한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으니 올테면 와라!” 하고 용기있게 선전포고하고 도전하여 싸우리라.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이스라엘을 망치는 것은 바로 당신이요!” 하고 용기있게 도전하듯이 수시로 구마기도하며 영혼들을 죄로 유혹하는 사탄을 향해 구마하리라.

이제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으니 용기있게 일어서자. 우리를 속이는 마귀를 대적하여 주님주시는 권능으로 과감히 물리치자!

나는 하느님의 자녀요, 주님의 사제이니 마귀를 쫓아내고 뱀을 쥐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으며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낫는 특권을 이미 받았으니”(마르코16) 무엇을 두려워하랴!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녀의 신분을 주셨으니 그에 맞갖은 권능도 부여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하자. 마귀의 노리개감이 되어 속고 살았던 과거를 청산하고 하늘왕자요 공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자. 공무원은 품위유지의무가 있다. 우리에겐 하느님의 왕자요 공주로서의 품위유지의무가 있다. 한번 죽지 두 번 죽으랴!

사육신이 단종이라는 한낱 사람에 불과한 임금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쳤다면 나의 임금이신 천상천하의 왕중왕이신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이야 얼마나 더 명예로운 일이랴!

포은 정몽주선생은 기울어가는 고려조를 위해 선죽교에서 단심가로 목숨을 내놓았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하물며 영생을 보장해주시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그것도 나를 위해서 먼저 죽어주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일백 번이 아니라 천만번 고쳐죽어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변할 수 없어야 하리라.

-. 바오로사도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체포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밀레토스에 에페소 원로들을 불러내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면서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며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고하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눈다.

복음선포자로서 뜨거운 열정을 쏟아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릇된 신관으로 크리스찬을 박해했던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의 열정이 드러나고 있다. 자신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줄로 착각하고 박해했던 이분이 참 주님이심을 증거하며 나같이 칠삭둥이같은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고 외치며, 박해하는 동족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해, 눈물뿌려 호소하는 바오로사도의 피맺힌 호소가 그의 13개서간을 통해 구구절절이 느껴진다.

주님께 저지른 자신의 과오에 대한 뉘우침과 바른 신관을 가르쳐주시고 당신사랑으로 인도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눈물어린 감사가 그의 생애동안 끊임없이 밀려오는 통절한 쓰나미 같은 고난에도 오뚜기처럼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한 신앙으로 단련시켰을 것이다.

드디어 영신의 아들 주교인 디모테오에게 옥중에서 순교직전 마지막으로 쓴 편지인 2디모 4,7-8: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삶이요, 아름다운 일생이요, 빛나는 생애인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십자가는 가벼워진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 멍에는 달고 내짐은 가볍다.”고 하신다.

주님을 죽도록 사랑하자. 그러면 인생에서 살만한 의미와 감사할 거리를 찾게 된다. 고난도 달게 느껴질 때가 오고 십자가가 가볍고 고난의 짐이 오히려 은총으로 달게 느껴질 때가 온다.

86세 고령의 마더 데레사의 가슴에 33세의 젊은 청년의 피가 끓었듯이 우리 가슴에도 주님의 청춘의 피가 끓도록 말씀양식과 성체의 양식으로 주님의 피를 수혈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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