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축일 강론

연중 25주일

by 이스테파노신부 posted Sep 2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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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5주일(지혜2,12-20; 야고3,18-4,3; 마르9,30-37) 인간은 고통을 싫어하므로 본능적으로 고통받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1독서의 의인은 율법에 충실한 히브리인의 집단적인 상징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점차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모습으로 인식하고 주석하기 시작한다. 마태오 복음27,42-43은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살리지 못한느구나! 저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하느님이 원한다면 어디 살려보시라지.” 하는 이 대목은 분명 지혜서의 반향이다. 복음은 길을 가면서 누가 제일 높은가를 다투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시고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다.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해서는 제자들이 상상도 못한 일이므로 두려움에 싸여있다. 제자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는 대조를 이룬다. 인간의 길과 하느님의 길의 차이라고나 할까? 예수께서는 온통 자신을 버리기까지 스스로를 낮추시는데, 사도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헛된 명예를 다투고 있다.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는 질문에 제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그 이유는 자신들이 스승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후회와 회한이 어린 침묵인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수난의 길을 가시는데 그들은 서로 윗자리를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 가르침은 공동체의 무질서를 주장하시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공동체와 교회 안에도 다른 형제들을 보살펴 줄 첫째자리가 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어디까지나 봉사직이지 권위직이 아니다. 만일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여기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바로 그 자체가 자신이 무자격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첫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작든지 크든지 간에 공명심을 위한 유희가 아니다 형제들을 위한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첫 자리는 십자가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사이에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잗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고 하셨다. 교회 안에서도 봉사로서의 권위의 개념이 망각되거나 소홀히 하기 쉽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시며 당신 자신을 아무에게도 인정 받지 못하는 어린이와 동일시 하셨다. 참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요 오직 겸손과 평화를 가져다 준다. 윗자리를 차지 하려고 경쟁하는 인간의 열망에는 평화도 없고 겸손의 바탕도 없는 세상적 지혜일 뿐이다. 바오로사도의 말씀에 의하면, “장로(주교)가 되기를 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장한 일입니다. 더 큰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대개는 그 십자가를 보지 않고 명예만을 바라고 탐을 내기가 일쑤입니다.”고 하였다. 그것은 스스로 무자격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장상의 십자가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가를 안다면 함부로 겁 없이 탐을 낼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