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축일 강론

성금요일(이사62,13-12; 히브4,14-16; 요한18,1-42)

by Stephanus posted Mar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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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일

성목요일(주님만찬 저녁미사:탈출12,1-14; 1고린11,23-26; 요한13,1-15)

 

 

이밤에 예수님은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다. 어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스승이 있는가? 예수님은 진정한 봉사자의 자세를 실천을 보여주신 분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고 하시고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다.

베드로는 너무나 황공하여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제 발은 절대로 안 됩니다.>> 하고 거절하려고 하나, 예수님께서, <<내가 네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참된 봉사의 의미를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교회의 봉사자들의 자세에 관해 모범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지상대리자인 교황님도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정의하고 하느님의 종인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춘다. 그럴수록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로 존경을 받게 된다.

교황님이 그렇다면 교회 안에 봉사하는 모든 사람은 신자들을 위한 봉사에서 진정한 권위를 찾아야 할 것이다.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이는 내 몸이라. 받아먹어라>> 하시고 포도주잔을 들어 축성하시고, <<이는 너희를 위해 새롭게 맺는 계약의 피다. 받아 마셔라.>>

하시며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영혼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

이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기 살과 피를 자녀를 위해 내어줄 수 있으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어줄 사람이 있겠는가?

오늘 예수님의 만찬석상의 발을 씻어주시는 행위와 당신 살과 피를 우리의 음식과 음료로 내어주시는 행위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절정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제자중의 하나에 의해서 게쎄마니에서 예수님이 사랑의 배반을 당하실 때 그것은 스승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마음 아픈 배신이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지만 인류에 의해 배신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가장 처절한 상처를 받으셨지만, 십자가의 용서로서 죽음보다 강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해준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고 하신다. 즉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봉사와, 벗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강력한 권고에 귀를 기우리자.

 

 

 

 

성금요일(이사62,13-12; 히브4,14-16; 요한18,1-42)

 

 

성금요일을 우리는 Good Friday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가장 슬퍼해야할 날이 왜 좋은 날이라고 할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죄가 면제되거나 그 범죄행위가 잘했다고 칭찬받을 일은 결코 아닌 것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피의 대가를 자기들이 받겠다고 호언장담한 결과로 2000년 동안 나라 잃은 백성으로 온갖 서러움을 당하고 지금도 그들의 영신적인 구심점인 예루살렘성전을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긴 채 통곡의 벽에 매달려 그 옛날의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를 회복시켜주시기를 외치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 처형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 또 다른 메시아를 보내달라고 고집스럽게 부르짖고 있지 않은가?

오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3시간 동안 단말마와 같은 고통을 받고 신음하시다가 운명하신다. 인간의 잔인성이 극에 달하여 창조주를 나무에 매달아 죽인 것이다.

십자나무는 창조주의 피를 흥건히 묻히고 죄송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괴로워하고 있다. 선악과의 불행한 죄악이 나무에서 비롯되었으니 예수님은 나무에서 구원을 성취하고자 하셨다.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물든 나무는 이미 원죄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었다.

예수님의 지존하신 손과 발에 박아대는 망치와 쇠못도 창조주의 곱디고운 손과 발에 상처를 내는 죄송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몸부림친다.

하늘의 해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모습을 감추니, 사방은 어둠으로 덮이고 말았다. 동산의 새들과 짐승들, 온갖 피조물이 창조주의 잔혹한 죽음을 숨죽이고 지켜보면서 불안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먼 옛날 이분의 손길로 손수 빚은 창조의 작품 중에 가장 걸작품이라고 만족해 하셨던 바로 그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계시는 우리의 창조주요 구세주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시는 가상 7언을 음미해보자.

 

 

1.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도끼-향나무 찍으면 향기가 자기를 찍어넘긴 도끼날을 감싸듯이.

예수님을 찌른 창검을 늑방의 물과 피가 감싸고 흘러내린다. 용서의 강물이 당신을 저주한 인간과 땅을 적시며.

왜 용서해야 할까?- 그들이 하는 엄청난 죄악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느님을 찌른 죄악을.

창조주께서 그분을 살해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면, 나는 나에게 상처 준 사람쯤이야 당연히 용서해야할 것이 아닌가? 오늘 나는 나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의 명단을 불러가며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용서의 기도를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도 죽으셨지만, 내가 미워하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이다.

 

 

2. <<,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리라.>>

우편강도의 회개와 의탁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최초의 행운아가 되었다. 평소의 도둑질의 솜씨로 마지막에 천국을 훔친 행운아이다. 직업은 못 속여! 예수님의 자비에 비하면 우리의 죄는 화롯불에 물 한 방울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하여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는 것이다. 용기를 내자.

 

 

3.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서있는 요한 사도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넘겨주시니 이제부터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는 이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다시 형성하시기를 원하신다. 성모님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으실 때에는 무통분만이었지만, 골고타에서 인류를 낳을 때는 얼마나 극심한 산고를 겪으셨는가? 성 벨라도는 “오 놀라운 교환이여!” 하고 성모님을 찬탄하였다.

 

 

4.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때때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앞에서 모습을 감추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가 있다. 죽음, 질병, 9.11 테러와 같은 갖가지 형태의 엄청난 재난 등, 이러한 끔찍한 사건들 앞에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우리는 이 때 성경 시편 22편을 찾아 읽으며, 우리 마음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을 받아들이자.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찬란한 빛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로 하여금 죄인의 고독을 철저히 체험시키셨다. 아자젤의 염소로서 인류죄를 당신 머리에 뒤집어 쓰시고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듯한 절해고도의 고독의 몸부림이다. 이 절규는 또한 우리 인간이 죄의 상태에서 부르짖는 구원요청이기도 한 것이다.

죄의 실상-고독 하느님으로부터 소외- 아드님으로 하여금 죄인들의 고독을 철저히 맛보게 하시는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는 죄지은 인간의 절규! 인간이 하느님을 등지고 떠난 후 고독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예수로 하여금 이 인류의 죄의 실상을 죄인의 현존을 체험시키고 죄인의 고독을 체험시키고, 죄인과 함께 울게하시고 십자가아래 엎드려 목 놓아 울게 될 죄인들의 상처 체험시키며 용서의 깊이를 깨닫게 한다.

 

 

5. <<, 목마르다!>>

이 예수님의 갈증은 당신의 우리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을 탄식하시는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6. <<내가 다 이루었다!>>

우리 죄로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 찟기고 할퀴는 고통을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요한17장)으로 받아들이는 기막힌 사연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값진 선물은 통회의 눈물이다. 당신의 애타는 사랑을 받아달라는 호소이다. 그래서 주님은 여전히 목마르시다.

청개구리도 엄마의 마지막 유언은 들어주었다. 즉 청개구리도 회개할 줄 알았다. 오늘도 청개구리는 엄마에 대한 불효를 통곡하며 울거늘, 예수님의 유언을 듣고도 울 줄 모른다면 청개구리만도 못한 목석일 것이다!

우리의 무디고 완악한 마음을 가슴을 치며 통곡하자!

통회의 눈물로 우리의 긴 겉옷을 빨아 예수의 선혈에 적셔 부활의 흰옷으로 갈아입도록 하자.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Father, into your hands, I commend my spirit!)>>

예수님의 죽음의 고통 속에서 외치는 이 마지막 절규는 아버지와의 깊은 사랑의 일치를 표현한다. 우리도 고통에 처할 때, 십자가상 죽음의 극도의 고통 중에 계시는 주님과 더욱 깊은 사랑의 일치를 이루도록 하자.

 

 

*묵상*

생명자체이신 분이 죽음을 받아들인 신비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허무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인간이 자유의지 남용으로 인해 생명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 잘못을 생명자체이신 하느님이 인간을 대신하여 보속하기 위해 그 죽음을 대신 떠맡으신 것이다.

선물을 맏은 자가 선물을 잘못 관리하여 손상시켰다면 자업자득이므로 스스로 포기하고 끝날 일인데,

하느님은 오히려 그 선물을 다시 회복시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선물로 바꿔주신 것이다.

단지 에덴동산에서의 원죄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시켜주셨다면 또다시 범죄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행복의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새 생명은 다시는 죄로 인해 죽음에로 돌아갈 수 없는 완전한 생명인 것이다.

인간이 실수하고 더 큰 선물을 받았으니 염치없지만 인간은 오늘을 Good Friday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성혈로 피값을 치르고 얻어주신 고귀한 선물이기에 죄송하고 감사할 뿐이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을 면하였다면,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흘러내린 고귀한 피가 우리 입술에 닿았으니 우리는 이제 주음을 넘어 영생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선물의 가치가 아무리 크고 좋은 것이라도 그 가치를 깨닫는 자의 인식여하에 따라 감사와행복의 정도는 천차만별인 것이다.

죽음의 운명에 놓인 인간이 영원한 생명응ㄹ 선물로 받은 이 벅찬 감격을 얼마나 실감하고 사느냐가 그의 행복지수를 결정한다.

그런데 세상은 이 큰 선물을 거부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예수성심을 아프게 한다.

오늘도 예수성심이 아파하시는 것은 당신의 고귀한 선물을 외면하고 죽음의 길로 향하는 무리들 때문이다.

우리 성직자 수도자들은 영혼구원을 위해 노심초사 애태우시는 예수성심과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십자가게 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애태우시는 예수님성심을 깨달아야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하느님 자비의 희년을 제정하시고 하느님 자비에 의탁하라고 부르고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선물을 받아들여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뜻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보물을 바라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보물을 손에 쥐고도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자.

우리가 그 보물의 진가를 알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그리스도의 보혈로 얻는 영생의 보화를 저들에게 깨닫게 해 줄 것이 아닌가?

우리 수도자들은 보물을 손에 들고 행복해하는 사람답게 살아가자.

 

 

 

 

 

 

 

 

 

 

 

 

 

 

 

 

 

 

 

 

 

성 금요일................................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놀라며, “세상에 이런 일이....”하고 말을 잇지 못한다.

-. 임금이 신하에게 매를 맞고 조롱당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세상에 이런 일이....”하며 놀란다.

-. 또 주인이 종의 발을 씻어준다면 그것도 큰 사건이기에 “세상에 이런 일도....”하며 놀란다.

-. 그런데 오늘 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느님이 피조물에게 매를 맞고 조롱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것도 죄없는 분이 대역죄인처럼 처형당하신 것이다. 생명을 만드신 분이 당신이 손수 빚어 만드신 인간에 의해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태양도 너무 황당하고 면목이 없어 빛을 잃고 온갖 피조물이 모두 숨ㅂ죽이고 고개를 떨군다.

하느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만이 악다구니처럼 창조주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고 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은 “세상에 이런 일도...” 하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인간만이 당연하다는 듯 창조주를 조롱하고 있다.

이사야서는 이 참혹한 광경을 이렇게 묘사한다(52,13-15).

“그의 모습이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지고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을 하였다. 이제까지 있어본 적이 없고, 들어보지도 못한 끔찍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가 막히면 말도 안 나오는 법이다. 그저 침묵할 뿐이다.

그분이 죽어가면서 하신 몇 마디 말씀만 유언처럼 되새기며 침묵하자.

 

 

인간세상에서 끊기고 마침내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것 같은 절해고도의 고독 속에 외치는 마지막 절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럼에도 그분은 저들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때문입니다.” 하셨고, 당신 사랑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응답을 원하시며

“목마르다!”고 사랑의 갈증을 호소하셨다.

요한 사도를 향하여, 당신 어머니 마리아를 가리켜, “이분이 네 어머니다.” 하시고는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신다.

이는 내가 네 빚을 내피값으로 다 치렀다는 의미가 아닐까?

세상에 이런일이 있었음을 놀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두 번 더 놀랄 일, 즉 그분이 부활하실 것과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을 아울러 묵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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