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05.12.13 11:47

마음 그릇의 준비 (1985년 12월 16일 / 대림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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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탄 준비를 하면서 예수님을 뵈러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어하는 원의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줄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뵈올 수 있는 데 방해되는 장해물을 마음속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을 뵈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제관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바로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도 한 가지 물어 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는지 말하겠다.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하늘이 준 것이냐? 사람이 준 것이냐?” 그러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 권한을 하늘이 주었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사람이 주었다고 하면 모두들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으니 군중이 가만있지 않을 테지?" 하며 저희끼리 의논한 끝에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복음 말씀에서 우리들은 대제관들이나 백성의 원로들이 백성을 대표해서 예수님께 정당한 질문을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백성의 지도자로서 예수님이 참으로 하느님께 보냄을 받은 예언자이거나 구세주라면 자기들부터 먼저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백성들을 대표해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을 하는 그들의 마음씨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좋은 뜻으로 이런 질문은 한 것은 아닙니다. 대제관들이나 백성의 원로들은 과거에는 백성들이 자기들을 따랐는데 예수님 때문에 백성들이 자기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으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워서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했더라면 예수님께서는 왜 밝히 말씀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예수님 말씀에서 어떤 트집을 잡을 만한 근거를 찾아서 예수님을 없애버리고자 이런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들여다보시고,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으시려고 그들에게 되레 질문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대답하면 왜 요한 세자를 믿고 세례를 받고 따르지 않느냐는 결론이 내려질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요한 세자를 하느님의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백성들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 있으니까, 그 질문에 답하기가 곤란해서 ‘모르겠다’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심으로써 그들이 바라는 대답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주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구세주로 임하셨습니다. 그러면 당신 사명을 백성들의 대표인 이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내셔야 할 의무도 한편으로는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고 하셨듯이,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르고 저희들에게 돌멩이질을 한다고 생각하여 돌아서서 물려고 할 테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던 대제관들이나 백성들의 원로들, 바리사이파나 사두가이파들은 자기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위선적이었습니다. 그 위선이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그들은 하느님께 봉사할 마음이 없었고, 하느님을 이용해서 자기들만 이 세상에서 편하고 재미있게 잘살아 보겠다는 이기주의적인 욕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마음 그릇이 비워져 있지 않으니까 마음이 교만해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은혜를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색해서 은혜를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은혜를 받을 만한 마음의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시고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요 구세주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태생 소경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도 당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당신 제자들에게도 드러내셨는데, 왜 백성들의 대표자들인 대제관들이나 백성들의 원로들에게는 이렇게 밝히 드러내시지 않은 것입니까? 만약 그들의 마음이 겸손했더라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다 들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 11,3) 하고 묻게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11,4-6)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업적이 증거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많은 기적들, 마귀를 쫓아내고,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고,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들이 다 옳고 거룩한 말씀이니까 그들이 겸손했더라면 충분히 듣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시니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너희들은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하시면서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 주마." 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십 년 동안 병상에 누웠던 반신불수가 벌떡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마태 9,2-8).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자가 하나도 없었고, 예수님의 업적에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들은 눈을 감고 그 모든 말씀이나 업적들을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와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귀족 출신이고 예수님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지만 목수 요셉의 아들로서 하루하루 벌어서 먹는 품팔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얕잡아보고 업신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원인은 자기들의 생활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자기들이 과거에 행한 위선적인 생활을 개선해야 하는데 그것을 고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른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그들에게는 귀찮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서 그 근거를 잡기 위해 예수님께 따지고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올가미에 예수님께서 말려드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교만이고 그 다음에는 해태입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아비라고 하고, 해태는 모든 죄의 어미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다른 모든 죄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교만은 바로 아담이 지은 죄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어서 하느님 앞에 굽히기 싫어하는 마음,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교만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하느님을 공경하는 대제관이요, 백성들의 우두머리였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이용해서 자기들이 살고 싶은 마음이었지,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들의 생명을 바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교만했기 때문에 그들은 위선적으로 남을 속였습니다.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께 겸손하게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일부러 남에게 착하게 보여 남들로부터 대우를 받고, 선물을 받고, 성서 말씀대로 과부의 재산을 우려먹기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고치기는 싫어했는데, 그것은 해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고치기 원했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들이 원하는 은혜를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해태로 결점을 고치기 싫었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기 싫어서 자기들이 살 수 있는 핑계를 찾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니까 예수님께서 은혜를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수도자들은 다 완전하게 삽니까? 오늘날에도 우리는 성서 말씀이나 성인 행적을 읽을 때나 그 외 강론 등 여러 가지 좋은 기회에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 또 자기 생활을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과 게으름 때문에 자기 생활을 고치기 싫어하는 사람들, 이들은 항상 같은 생활을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영신적으로 진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합니까? 기도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하느님께 은혜 받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 기도 생활은 지루하고, 마치 오늘 이 사람들이 요한을 받아들이자니 어렵고, 안 받아들이자니 다른 문제에 부딪히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수도자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가 3,16)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들은 요한의 그 말씀도 흘려 듣고 예수님께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피하시기 위해 역시 요한을 이용해서 ‘너희가 요한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하느님께서 직접 어떤 기적을 보여 주시든지 내 마음을 돌려주시면 결점을 고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19-31)에서 부자가 지옥에 빠져서 아브라함 성조를 바라보며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할 때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니, 부자가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들도 일상 생활에서 규칙과 지도자들의 명령, 교회의 계명, 이 모든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연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예수님도 하느님도 받아들이지 않는 생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더 큰 은혜, 내 기분에 맞는 은혜로 하느님께서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나를 묶어서라도 당신 앞에 굴복시킬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질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즉 스스로 모순을 범하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내실 때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공로가 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꼼짝달싹 못하게 내 자유를 빼앗아 가시는 그 시각은 바로 우리의 심판 때요, 죽음의 때입니다. 죽은 다음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세는 ‘내가 죄를 범하더라도, 내가 통회하지 않고 죽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천당 자리를 준비해 주시오’ 하고 요구하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하느님을 이겨 보겠다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옛날 로마에 율리아노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궁중에 내란이 생겨 죽을 뻔했는데, 교회에서 구해 주어 나중에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간섭이 싫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으니까 배교를 하고 교회를 박해하려 해서 그에게 율리아노 아뽀스따따(Apostata:배교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황제는 자기 권력만 믿고 성서 말씀을 뒤집어 놓으려고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진이 나고 광풍이 불어서 오히려 남아 있던 성전의 벽까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 황제는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활에 맞아 죽으면서도 지금까지 자기가 예수님과 대결해서 싸워보겠다고 노력했기 때문에 통회할 줄 모르고, “나자렛의 예수야! 네가 나를 이겼다.” 하며 쓰러졌다고 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교회의 많은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하느님 대전에 마음을 굽혀서 하느님을 따르려 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자기 고집대로 살아서 결국 그대로 죽어가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마태 21,9) 하고 예수님께 찬송을 드리지 못하고 율리아노 아뽀스따따처럼 실망하여 “나자렛의 예수야! 네가 나를 이겼다.”고 하면서 쓰러져서야 되겠습니까. 수도자들도 마음을 고치지 않고 생활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런 결과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뵈려고 부모도 형제도 자매도 아내도 자녀도 다 끊었지만,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즉 자기 중심주의로 사는 사람은 남을 끊어도 자기는 끊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예수님을 뵈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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