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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림절에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뵈러 가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조상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 두 군데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족보가 서로 맞지 않는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의 조상은 똑같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서학자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을 합니다. 유다의 법에는 근친혼이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형제끼리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고대 사회에서는 가까운 친척들끼리도 혼인을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같은 다윗의 후손인데, 성서학자들 중에서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고, 야곱의 여동생이 안나이고, 이 안나가 마리아의 어머니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는 내외종 사이입니다. 요셉 편에서 보면 고종 사촌이고, 마리아 편에서 보면 외사촌입니다. 또 구약 법에는 형이 결혼해서 아들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형의 이름으로 아들을 낳아 기르는 수혼제(嫂婚制)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친아버지와 양아버지가 구별이 되는데, 한편에는 친아버지 이름을 넣기도 하고, 한편에는 양아버지 이름을 넣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족보를 두 갈래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세 단계로 나누어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귀양가기 전까지 14대, 또 그 후 예수님까지 14대라고 말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잘 계산해 보면 제일 마지막에는 13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의 끝에 있는 사람을 밑으로 붙이면 14대가 됩니다. 그리고 가운데 14대는 성서에 보면 실제로 14대가 넘는데, 14대로 축소시켜 놓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이것은 마태오 사도가 예수님의 족보를 사실 그대로 써놓기보다는 옛날 사람들은 입으로 외웠기 때문에 외우기 좋도록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시대적 성격으로 볼 때 첫 14대는 성조들로서 구약의 판관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다음의 14대를 다윗 왕부터 바빌론으로 귀양갈 때까지라고 한다면, 그때는 왕정 시대였습니다. 또 바빌론 귀양에서 돌아와 성전을 복구하고 하느님께 다시 제사를 지내게 될 때는 임금이 없던 제관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세 시대로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판관 시대에서 판관은 지도하고 가르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예언직, 교도직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왕정 시대인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귀양 갈 때까지는 제왕 시대이므로 그리스도의 왕직인 사목직을 말합니다. 마지막에 제관 시대라는 것은 예수님의 사제직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 직책을 한 몸에 지신다는 것을 미리 예시해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여자들 이름이 몇 나와 있는데 거기에는 명예롭지 못한 사람의 이름도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고”라고 되어 있는데, 다말이라는 여자는 유다의 아내가 아니고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남편이 죽고 난 후 앞에서 말한 대로 수혼 제도를 지켜줄 줄 알고 기다렸는데 유다가 자기 아들이 또 죽을까 싶어서 약속을 안 지키니까 다말이 유다를 속여서 유다의 아기를 가져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야의 아내가 나오는데 우리야는 다윗 왕의 부하였지만 다윗이 전장에 보내서 죽게 하고 그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거기서 솔로몬 왕이 태어났는데 솔로몬 왕 때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쳤고 나라도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는 보잘것없었습니다. 솔로몬은 마지막에 죽기 전에는 우상도 숭배하고 외국 여자들도 많이 맞아들여서 여자들의 풍습에 따라 우상 숭배를 했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본보기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늘 나라에서는 현세적인 업적이나 인간적인 지혜보다는 하느님 대전에 얼마만큼 신앙으로 살아왔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는 다윗의 뿌리에서 돋은 그의 자손이며 빛나는 샛별이다.”(요한 22,16)라고 당신 자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후손과 뿌리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뿌리라는 것은 나무 뿌리에 비할 수 있고, 후손이라는 것은 나무 열매에 비유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다윗의 뿌리이고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은 우리가 알아듣기에 힘든 점도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교하실 때에 아브라함보다 당신이 먼저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15)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바로 예수님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 예수님이요, 다윗의 후손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들이 불림을 받았고 그들의 성소가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성소니까 성소의 뿌리는 예수님이지 하와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고, 다윗도 아니고, 성모 마리아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뿌리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성모 마리아도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께서 하와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다윗의 후손 중에서 구세주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명예롭고 다윗이 명예롭기보다는 바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약속을 받은 그 이름들이 약속된 그 목표 때문에 명예롭게 된 것입니다. 그분들은 바로 구세주의 조상으로 간택되었기 때문에 명예롭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모 마리아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간택되었기 때문에 귀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소의 뿌리는 바로 구세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는 그분들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계획에 있어서 우리 인간이 귀하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이 물질로 구성된 육신을 쓰고 태어난 것이 귀한 것은 아닙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짐승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생명을 주시면서 모든 것을 살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에 미물인 곤충도 살기 위한 지혜를 가지고 있고, 제 생명을 전해 주기 위해 새끼를 치고 생명을 전해 주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지혜라는 것도 역시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혜를 타고났다고 하지만 동물의 본능이나 지혜와 인간의 지혜는 오십 보, 백 보 정도의 차이지 근본적인 차이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간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다른 피조물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지혜를 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참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도 그 성소의 뿌리이신 구세주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들이 구세주의 조상으로서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그 점에 있어서 그분들의 품위가 영원히 가치 있게 되었고, 하느님 사업에 샛별처럼 영원히 빛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의 참 가치라는 것은 성소에 있는 것이고, 또 그 성소를 얼마나 잘 받았느냐,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했느냐, 성화 되었느냐 하는 그 점에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하느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고 명예로웠던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우 생활을 하는 것도 우리의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속해 주신 덕택이고, 우리가 수도 생활을 하는 것도 하느님 사업의 협조자로서의 품위인 것이지, 우리 자신이 인간적으로 출중하고 뛰어나서 이런 영원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복지로 찾아갈 때 가나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육신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훌륭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들어갔을 때 가나안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키가 더 크고 몸이 장대하니까 겁을 내어 하느님께서 쳐들어가라고 해도 가지 못하겠다고 실망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 결국 그 사람들을 그 지방에서 다 쫓아내시거나 죽이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하도록 만드신 것은 하느님께서 목적하신 계획에 따라서 한편은 거세되고 한편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예전에는 패싸움이 나서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오늘날에도 전쟁이 나면 사람들이 많이 죽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이 세상에 산다는 데 인간들의 궁극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더불어 끝없이 사는 데에 인간의 참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간적으로 얼마나 훌륭하게, 호화롭게, 빛나게 살았는가 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협력을 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걸었느냐 안 걸었느냐에 우리 인간의 영원한 가치가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태를 빌리시어 인간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서 미리 간택되셨을 뿐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외아드님으로서 인성을 취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와 똑같이 족보에 따라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아버지 없이 성령의 힘으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덕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길을 우리에게 개척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생활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예수님의 족보에 따라서 깊이 묵상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마리아 몸에 잉태되셔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정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동생들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천주성으로서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고, 우리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양자가 되는 것이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족보에도 친아들이나 양자나 같이 대를 이었듯이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의 생명을 받게 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활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다른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스를 수도 없는 분이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 되지만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지만 더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성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모든 점에 있어서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난 후에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하느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을 떠날 수도 있다는 점을 항상 겸손하게 생각하면서 조심성 있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생활을 성화시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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