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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성탄성야미사(이사9,1-6; 디도2,11-14; 루가2,1-14) 찬미 예수님! 예수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하느님이 아기로 태어나신 신비 앞에 경탄하며 모여 있다. 이 신비를 바라보며 만일 우리가 스스로 커지려고 안간힘을 쓰며 높아지려고 떼를 쓰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체성사의 잔치상에 초대받았으나 예복을 입지 않고 준비없이 참석한 것과 같은 것이다. 모든 아기의 출산은 주위사람들에 기쁨을 준다. 특히 그 어머니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 태어난 아기가 주는 기쁨은 남다르다. "그의 어깨에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의 통치는 영원무궁할 것이며 정의가 꽃피는 그의 성대에 영원히 평화넘치리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선언한다. 이 아기는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과 평화, 정의와 구원이란 엄청난 대사가 구유에 누워있는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가난한 간난 아기의 양어깨에 메어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인간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세상은 권력가인 체사레아의 아우구스또 왕이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심어주리라고 생각했다. 왕 자신도 평화의 구원자요 군주로 자랑하였다. 강한 자요, 군대를 거느린자이며, 명령권자만이 타인들에게 평화를 줄 수 있고 구원을 가져다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인간의 이러한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뒤엎으셨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은 자는 선택하셨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자를 선택하신"(1고린1,27) 것이다. 지금 구유에 누워계신 이 가난한 어린 아기보다 더 약한 자를 누가 보았는가? 하느님은 이러한 징표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통해 이 신비를 드러내신다. 돈과 권력과 힘이 진정한 기쁨과 평화와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하느님께서 오늘 이 아기 예수님의 성탄신비에서 드러내준다. 주님은 언젠가 이 오묘한 신비에 대해 하늘 아버지께 감사하며 "그렇습니다.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권세있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신비를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에게 나타내보이시니 감사합니다"고 찬미 드린 바 있다. 아기 예수님의 이 역설적 신비 앞에서 잠시 머물러 무의식 중에 우리 의식속에 자라난 힘과 권력과 황금의 잣대를 부수고 침묵 속에 가난과 연약함의 위대성을 묵상하자. 이분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연약한 자를 이해하시기 위해 스스로 연약한 자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육화를 통해 우리 인간본성을 취하셨듯이, 우리 크리스찬들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성 대레오교황은, "오, 크리스찬들이여, 당신의 품위를 깨달으십시오. 신적 본성에 참여하고 있는 당신은, 무가치한 행동으로서 과거의 비천한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하고 각성시켰다. 또한 하느님의 육화는 하느님의 당신백성에 대한 사랑의 최대표현이다. 하느님은 성탄을 통해 우리 인류와 혼인하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생명과 사랑의 깊은 잔치로 초대하신다. 하느님의 육화의 신비에 참여한 인물들은 누구인가? 마리아와 요셉과 목동들이다. 마리아가 동정의 몸으로 잉태하였다는 것도 놀라운 신비이며 아들 예수에 대한 놀라운 신비들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음"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과연 무슨 일이 그 아들에게 일어날 것인지 하느님은 그를 어떤 길로 인도하실 것인지 등에 대한 모든 장래의 일에 대해서도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마리아의 겸허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성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전대미문의 사실을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니 성요셉의 겸덕과 믿음도 경탄할만하다. 이제 우리는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모으자. 고사리와 같이 작고 예쁜 손은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셨던 손이다. 지금은 고사리와 같이 나약한 모습으로 피조물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계신다. 아기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자. 이 시선은 우주를 꿰뚫고 인간의 마음과 골수를 투시하시는 천리안으로서 지금은 천진난만하고 청초하게 사랑 가득히 머금고 나의 시선을 기다리고 계시다. 아기 예수의 입을 바라보자. 이 입은 참된 행복의 길과 진리를 토해내실 입이며 불의를 질타하시는 정의의 포문이 되실 것이다. 지금은 다만 봄눈도 녹여낼 사랑의 미소가 넘치고 있다. 온 세상을 입혀주고 먹여주시는 우주의 주재께서 지금은 벌거숭이가 되어 보드라운 살을 드러내고 피조물의 도움을 기다리고 계시다. 이 아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분노와 복수심으로 들끓던 우리의 마음이 봄눈 녹듯 녹아버리고 미움과 질시의 시선으로 이웃과 불목하던 우리의 마음을 평화의 대화의 장으로 인도할 것이다. 오늘 예수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기쁨과 평화이니 분노와 불목과 안 좋았던 과거의 언짢은 기억들을 모두 연기처럼 날려버리고 이웃과 화해하자. 복음나누기 주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에수님은 우리에게 화해와 평화를 주시기를 원하신다. 불목하였던 형제가 생각나면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아기 예수님처럼 밝은 표정으로 이웃과 화해할 결심을 합시다. 서로의 결심을 나눕시다. 새벽미사(이사62,11-12; 디도3,4-7; 루가2,15-20) 한 아기의 탄생은 온가족을 기쁘게 해준다. 여기 한 아기가 구유에 누워계신다. 이 분이 누구신가? 남의 도움 없이는 생명을 지탱하기 어려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계신 이 분이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어느 왕자처럼 호화로운 궁궐에 태어나실 수도 잇었고, 억만장자의 옥동자로 탄생할 수도 있었을 이 분이 강보에 싸여 외양간에 누워 계신다.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처음으로 전해들은 이들은 바로 다름아닌 목동들이었다. 유류상종이라고 했듯이 미소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뵙는 눈은 역시 그런 부류의 목동들이었다. 천사는 목동들에게 "여러분은 한 간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동기가 될 것이다"고 전한다. 이 표징은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미소한 것이 위대함의 표요, 약한 것이 절대권세의 표가 되고 가난함이 부요함의 표가 될 것이란다. 이 분이 세상에 오신 후 세상의 가치기준은 이렇게 바뀔 것이라는 전조이다. 과연 후일에 그 분이 설파한 참된 행복 8가지는 이를 반영한다. "가난한 자가 진복자요, 지금 우는 이가 행복하고, 박해받는 이가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우리를 위해 태어날 한 아기, 이 분은 하느님의 숨겨진 위대함을 당신을 통해 드러내실 것이요, 지상에서는 이제 그 분으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갈라놓았던 하늘과 땅을 은총으로 다시 결합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구원은 시작되었고 천사들의 합창으로 이 놀라운 하느님의 탄생은 세상을 경탄케 한다. 최초의 경탄은 순박한 목동들에게서 일어나고 그들은 자신들이 전해들은 말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일찍이 세상에서 체험해부지 못한 일생일대의 대사건인지라 모두 놀라마지 않는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이기 잉태 후 기쁨에 넘쳐 마니피깟을 노래한 마음이 이제 고요한 명상에 잠겨 계신다. 목자들 또한 자기 일터로 돌아간 것은, 이 사건은 호들갑스럽게 경고망동할 일이 아니요, 일상생업에 충실하면서 마음의 내면에 일어나야할 변화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성탄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요,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의 최대의 선물이요, 지극한 자기 낮춤의 가난한 축제이다. 영원하신 분이 시간의 한계 안에 머물기를 원하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 보이는 형상 안에 오셨다. 무한히 크신 분이 이렇게 작은 아기의 몸에 머물러 계신다. 우리는 구유 앞에 머물러 하느님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셨음을 생각하고 이 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바를 깨달아야 하겠다. 첫째로, 하느님이 어린 아기가 되셨다면 나는 먼지와 같이 작아지고 낮아져야할 것임을 생각하자. 둘째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사람이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라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오직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해주셨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도 아기 예수님 앞에 머물러 그분이 무언의 웅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겸손을 본받고 그분처럼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봉헌하도록하자. 낮미사(이사52,7-10; 히브1,1-6; 요한1,1-18) 한 아기의 탄생은 온가족을 기쁘게 해준다. 여기 한 아기가 구유에 누워계신다. 이 분이 누구신가? 남의 도움 없이는 생명을 지탱하기 어려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계신 이 분이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어느 왕자처럼 호화로운 궁궐에 태어나실 수도 있었고, 억만장자의 옥동자로 탄생할 수도 있었을 이 분이 강보에 싸여 외양간에 누워 계신다. 이사야 예언자는 , "기쁜 소리로 함께 외쳐라. 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도로 찾으신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하며 환호성을 올린다. 사도 바오로도 화답하여, "하느님께서 어느 천사에게, 너는 내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고 그런데 오늘 태어난 아기가 바로 이 아들임을 증명해 보여준다. 구유에 누워 계신 이 아기는 한낟 피조물로 현대에 비로소 지음 받은 분이 아니라 이미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말씀님이시다.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으로 삼라만상을 손수 지어내신 주인공이다. 이 분이 세상에 오셨는데 막상 이분으로부터 지음 받은 세상은 이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분이 당신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이분을 맞아주지 않는다. 마치 포도원 소작인들이 주인을 몰라보고 문전박대 하듯이 종이 주인님을 몰라보고 무례를 범하듯이, 유다인이 수천년동안 기다려온 메시아가 막상 왔을 때는 그들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분이 태어나실 여관 방 하나 내어드리는데도 인색하여 끝내 마굿간 말구유에 누워 계신다. 끝내는 그들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말씀이 귀에 거슬려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 얼마나 역사의 모순인가! 그러면 우리시대는 어떠한가? 오늘도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러나 정작 주님을 만나뵙고 환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겉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실상 주님이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시면 문전 박대하기가 일쑤이다. 우리 마음이 세상일로 가득차 있다면 베들레헴의 초만원인 여관과 같이 아기 예수님이 들어오실 틈이 없는 것이다. 우리 마음 문밖에 추위에 떨고 계신 아기 예수님은 마굿간을 마다 않으시고 강보에 싸여 계신다. 아기 예수님은 화려한 성도 예루살렘을 마다하시고 시골마을 베들레헴을 찾으셨으며, 화려한 궁궐을 원하지 않으시고 마굿간을 거처로 삼으신 것을 생각해보면 그분이 오신 뜻은 더욱 심오하다고 하겠다.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러 오셨고 죄인들과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소생의 희망을 주시러 오셨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연약한 생명을 피조물에게 맡기시고 지존께서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은 그토록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성탄은 지존하신 하느님의 지극한 자기 낮춤의 소박하고 가난한 축제이다. 영원하신 분이 시간의 한계 안에 머물기를 원하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 보이는 형상으로 오셨다. 무한히 크신 분이 이렇게 작은 아기의 몸에 머물러 계신다. 우리는 구유 앞에 머물러 하느님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셨음을 생각하며 이 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바를 깨달아야 하겠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사람이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라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셨다"고 말한다. 멸망할 죄인인 우리 인간을 당신은총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 죄를 씻으시고 우리도 당신처럼 거룩하게 만드시고 "당신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요한1,12). 우리도 아기 예수님 앞에 머물러 그분이 무언의 웅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겸손을 본받고 그 분처럼 거룩하게 살아갈 결심을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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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사순 1주일 이스테파노신부 2003.03.05
151 연중 8주일 강론 이스테파노신부 2003.02.26
150 연중 7주일 이스테파노신부 2003.02.11
149 연중 6주일 이스테파노신부 강론 200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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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설 명절; 주님 봉헌 축일 이스테파노신부 2003.01.29
146 연중 3주일 이스테파노신부 2003.01.29
145 연중2주일(1사무3,3-19; 1고린6,13-20; 요한1,35-42) 이스테파노신부 2003.01.15
144 B해: 주님의 세례 축일(이사야 42,1-7; 사도 10,34-38; 마르 1,7-11) 이스테파노신부 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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