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0.31 03:29

마리아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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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론 서론 1. 현대 마리아론의 상황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교회를 구성해온 인류는 거대한 하느님백성을 이루고 각기 그 누구도 대치할 수 없는 고유한 역할을 담당한다. 하느님백성 각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내에 필수불가결한 구성원이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모두 교회안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들이다. 각자는 현재 상태 그대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보편적 상호의존성과 연대성 때문에 Hans Asmussen 은 <<구원의 세계는 의미충만한 거대한 조직이다. 교회는 각자가 구원사업에 자기몫을 담당하고 각자가 담당하는 역할에 따라 정당하게 평가될 때에만 정상적으로 건설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마리아가 교회안에서 정당한 위치에 대한 자리매김이 이루어져야할 필요가 있으며 만일 그렇지 못할 때 교회는 더 이상 질서를 잃게 되고 무질서와 미궁속에 빠지게될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교회의 무질서는 두가지 과불급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즉, 마리아론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 어떤 인물과도 비교될 수 없는 형태로 과장될 때 “마리아는 하느님 앞에서 보다 그녀 앞에서 사람들이 더 위안을 찾는 신적 특성이 투영된 유별난 존재가 되고 만다.” 한편 이러한 무질서는 마리아에 관해 과소평가할 수도 있다. 즉 마리아를 보통의 다른 여자들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한낱 평범한 아녀자로 취급하게 될 위험이 있다. 교회 안에서 마리아의 위치를 고려함에 있어 두가지의 경향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마리아의 성소와 성덕의 탁월성에 매료된 견해들은 마리아를 최대한 고양시키기를 원한다. 반면에 구원계획의 총체성에 보다 주목하는 다른 입장에서는 마리아를 이러한 구원계획안에 자리매김하여야한다고 강조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학자들은 마리아론을 독립적으로 다룰 것이냐 혹은 교회론에서 다룰 것이냐에 관해 오랜 기간 토론을 거듭하였다. 이문제를 놓고 공의회의 심의회는 거의 같은 수의 두 그룹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마리아론을 독립적 테마로 다루자는데에 1,074명이 찬성하였고 단지 40표가 많은 1,114명이 교회론에 삽입하여 다루자는 데에 찬성하였다. “ 마리아를 ‘일치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주제에 관해 만장일치가 깨어진 것은 그 여파가 널리 확산되는 일종의 당혹감을 자아냈다.” Laurentin 교수는 그의 저서 “마리아. 신학적 문제들”이라는 책에서 신학적 경향과 마리아 신심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최대한으로 상세하게 경계를 정하려고 시도하였다. 1). 신학적 관점에서, 첫째 경향은 “한번도 마리아를 만족스럽게 공경해드리지 못했다(De Maria numquam satis)” 는 입장으로, 동정녀에게 화관을 장식해 드리기 위한 새로운 보석과 같이 보이는 교의와 마리아론이 수적으로 불어나기를 원하였다. 기존의 마리아론에 관한 교의는 최대한도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띈 학자들은 마리아의 인격에 주로 관심을 두고 그 분의 특권을 강조하며 다른 모든 피조물 위에 최고 우위성을 주장한다. 둘째경향은, 현상유지적 차원에서 마리아론의 확장해석에 반대되는 이론이다. 기존의 마리아론은 최소한의 내용에 따라 설명된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마리아의 인격에 중요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에서의 그분의 역할에 중점을 두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절대적 우월성을 지니고 마리아는 그리스도에 대해 상대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신심의 차원에서도 두가지의 상반된 견해가 대립된다. 한편에서는 마리아께 대한 “노예적 봉헌”(devozione di schiavitù) 을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쪽에서는 “주님의 여종의 모방”(imitazione della Serva del Signore) 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전자의 입장에서는 발현과 사적계시에 최대 중요성을 두고, 후자의 입장에서는 이들 사적계시는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전자의 주장자들은 마리아께 대한 봉헌이 봉헌의 중심적 위치에 놓인다고 보고, 때때로 이입장을 극단화하여 마리아 중심주의(mariocentrismo)로 흐르게도 된다. 후자의 입장은 마리아께 대한 봉헌을 지나치게 신중을 기하는 나머지 때때로 이를 전혀 배제시키기까지 하여 마리아 혐오주의라는 극단주의가 되기도한다. 균형잡힌 마리아론을 구성하려할 때 만나게 되는 어려움을 인식하는데는 이정도의 설명으로서 충분하다고 본다. 아직까지 이 두 경향의 중용의 길을 찾기위한 시도도 없었고 더구나 순수한 상태에 도달한 적도 없었다. 마리아를 과잉공경한다는 문제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마리아 자신을(하느님에 앞서)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마리아를 평가절하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계시를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를 그분의 성덕과 사명을 함께 고려하여 구원사에서 올바른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 마리아론의 과제이다. 여기에 마리아론의 어려운 과제가 놓여있다. 마리아신심은 이 탐구에서 그 기초를 찾아야 한다. <<우리 현대인들이 구원경륜을 규명하고 일치, 형제애, 평화, 인류구원을 위해 일하고자 한다면, 마리아의 위치와 사명을 인정하기를 간과할 수 없다.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께서 세상에 들어오시기 위한 문이요, 우리 기쁨의 원인인 하늘의 문이 되신다.>> 2. 구원신비 안에서의 마리아 유일한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비요,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원의 중심이다. 신학은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신비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비의 전망을 벗어나서는 마리아론 교의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H. De Lubac 은 << 마리아론은 교의신학의 광대한 영역의 중심영역바깥의 외곽분야를 형성하므로서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여서는 안되며 오늘날 신학적 가르침이 그러하듯 구심점으로 인도하는 방사선형 도로처럼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한 분파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마리아론의 정당성의 기준이 있고 그 풍요로움의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마리아를 그 아들과 그의 구원업적에 연결시켜야 마리아론이 생명을 얻게 된다. 마치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 수 있듯이 , 마리아론은 그리스도론에 연결되어 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면 구원경륜(救援經綸:economia salvifica)상 성부께서 마리아에게 맡긴 사명은 무엇인가? 마리아를 당신 아들의 신비에 참여하는 역할로서 정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신비안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교회안에서 우리 구원을 위하여 마리아가 수행해야 할 사명은 과연 무엇인가?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제 8장은 마리아에 관한 내용을 집약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마리아>> 라는 제목을 붙였다. 3. 마리아와 교회 일치 운동 바오로 6세는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이라는 문헌을 통하여 ‘교회일치에 관한 교령’에서 이미 정의된 내용을 상기하였다. “여러 교회공동체와 타교회 형제들의 사상과 가톨릭교리 사이에는 마리아의 구원업적과 마리아공경에 대해 적지 않은 의견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 주교회의는 “오늘날 우리가 과거의 낡은 편견과 동일한 크리스찬적 유산아래 일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들의 차이점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공동노력을 경주하면서 보다 개방적이고 사랑의 정신으로 대화하기를 모색한다고 할지라도 예수의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집요한 종교적 차이점 중의 하나로 남는다.” 많은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에게 있어서 그들 중 두 거물급 신학자인 R. Mehl과 K. Barth의 견해는 거의 실질적으로 그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에 의하면 “가톨릭사상의 모든 이단사상은 가톨릭의 마리아론을 중심으로하여 발생한다. 즉 전통에 맡겨진 자치권, 교황과 주교에게 자의적으로 주어진 교도권, 공로교리의 모호성, 특별은총이 나누이게 되는 성부에게서만 은총이 분출되어 나오고 다만 공로의 가능성을 인간에게 맡기는 이론,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성의 부정, 그리스도의 온전한 육화의 부정 등” K. Barth의 견해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에 의하면, “가톨릭교회는 교리와 동정 마리아 공경전례를 통하여 그녀를 드러내고 옹호하고 현양한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교리는 로마교회가 그의 모든 결정과 교회 실존의 근거가 되는 일정한 교의적 기준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교의적 차이를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분야가 마리아교리와 마리아공경에 있다고 함이 적절하다. 이러한 교의적 차이에서 모든 다른 교리적 차이점들이 유래한다. 마리아론의 의미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정의는 아주 단순하게 마리아론의 원리와 전형적인 성격과 관념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적절히 표현한다. 그에 따라 인간인 피조물이 선험적으로 받은 은총을 토대로 하여 구원사업에 협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매우 적절하게 가톨릭 교회의 원리요, 전형이요,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 라고 지적하였다. 사실상,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의 마리아론적 시각에서는, 일반적으로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피조물일뿐>> 이라는 원칙들이 명백하게 표현된다. 그러므로 W. Meyer목사가 말한 바와 같이, 마리아론적 입장을 고수하느냐 혹은 바꾸느냐하는 문제는 개혁교회의 존폐가 달린 문제이다(“punctum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reformatae”) . 이것은 가톨릭 교회에도 타당하다. 위에 언급한 K. Barth의 견해에 관하여 가톨릭학자인 H. De Lubac은 “그들 개신교 신학자들의 평가는 무시하더라도 우리는 바르트학파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가톨릭의 신앙은 교회의 교리의 종합 혹은 어머니라는 관념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와 그녀의 특권적 은총지위 안에서, 구원에의 인간적 협력의 교리를 상징적으로 요약하여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마리아론이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을 가톨릭의 신앙고백으로부터 분리하는 보다 중요한 장벽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마리아론이 가장 현저하게 일치를 위한 접근을 저해하는 본질적인 신학적 난점을 제공하는 영역이 되고 있으며 이점에서 교회일치적 연구를 위해 역점을 두고 노력해야할 영역임을 지적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이러한 방향에서 <>는 이러한 테마로 세번의 회합을 가졌다. 이러한 관점아래 구원역사에서 마리아의 사명과 다른 신학 분야에서 마리아 교의에 의해 제안된 모든 교의적 선택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유혹에 넘어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즉 이러한 모양으로 프로테스탄트 형제들과 일치를 우선적으로 도모할 것을 은근히 제시하면서 마리아교리를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는 타협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에 관해 매우 중요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 형식과 방법에 있어서는 갈라진 형제들과의 대화에 어떤 형태로건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 모든 교리를 분명하게 절대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교회일치에 있어서 가톨릭 교의의 순수성을 손상시키고 순수하고 상세한 의미를 애매하게 흐려놓는 그릇된 “제종파 평화주의”(irenismo)만큼 방해가 되는 것이 없다.”(UR 11/534) 바오로 6세는 “애매모호성과 무관심주의와 위(僞) 제종파평화주의”를 경계하여 그 위험성을 주목하였다. “진리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하여 일치에 도달한 것으로 위장하는 것은” 아직도 토론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는 문제이다. 수에넨스(Suenens) 추기경은 적절한 기회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교의적 차이를 하나의 그릇된 애덕을 앞세워 의무나 되는 것처럼 적당히 일치된 것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각자는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하여 자신의 고유성을 보존해야한다. 가톨릭신자들은 이경우에 있어서 자신들의 신조에나 마리아신심에 대해 자신감없는 약한 목소리를 내어서는 안된다. 모든 악기가 각기 자기 고유의 음을 낸다면 성령께서 교향악과 같은 기도를 창출해 내실 것이다.” 마리아를 항상 그리스도에 연관시켜 언급하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자가브리아에서 1971년에 열린 제13차 마리아 국제회의에서 프로테스탄트인 마인홀트 박사는 “마리아신심은 그리스도론과 관련하여야 하며, 하느님의 어머니의 자리가 성경내용과 부합되게 구원역사에 관련시킬 때 오늘날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에서 제안될만한 적극적인 가치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J. Galot 교수도 <<상당수의 개신교 학자들과 성서적 마리아론의 본질적 노선에 관해 합치될 가능성이 있다.>> 고 교회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즘 운동을 희망적으로 본다. 결국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에서 중요한 사실은 공의회가 지적하듯이 <<가톨릭 교리의 진리에 있어서 일정한 질서나 단계가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마리아의 종 수도회 문헌에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차이점이 많은 동시에 일치되는 점도 많이 있다.’ 예컨대, 마리아는 영광스런 천주의 모친(Theotokos); ‘신적 은총이 가득하신’ 주님의 여종; 신심 깊고, 순종과 겸손과 용기있는 모범적인 여인... 등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동방정교와의 차이도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공의회는 동방교회와 우리 로마 가톨릭과의 일치하는 유대를 강조한다. 정교회는 하느님의 동정성모에게 대한 봉헌을 강조한다 . 동방교회는 전례에서 빛나는 찬미가로써 에페소 공의회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로 장엄하게 선언된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찬미한다. 마리아의 종 수도회 문헌은, <<우리는 동방교회가 교회일치 운동에서 수행하고 있는 중요한 역할에 비추어 마리아 신심의 크리스챤적 의미의 명백화와 심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리라고 믿는다.>> 고 기술하고 있다. 바오로 6세교황께서는, <<구원사와 복음에서 여러분은 교회의 사상과 기도의 큰 재산을 전달하는 전례의 보고(寶庫)에서 처럼 마리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챤 신비의 총체안에 마리아를 결합시키도록 신중한 배려를 한다면 곧 마리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마리아 공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여러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하느님의 영광에로 그리고 교회의 사랑에로 인도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차지할 자리는 어디인가? 사실상 이는 신앙의 고유문제에 속한다. 말씀의 육화는 마리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구원에 대한 마음으로 예수께서는 또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도록 당신 어머니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셨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그분 인성의 보장이요 그분 구원업적의 협력자이신 분 마리아를 떠나서는 안전할 수가 없다. 우리의 신앙은 종합적이다. 그중에 어떤 부분이 결여되면 위험이 불가피하다. 한편을 믿는데 용기를 잃어버리면, 점차 나머지도 흔들리고 균형을 보존하는데에도 매우 어렵게 된다. 교회는 마리아에 관한 기도나 전례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역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관해 언급하고 박해를 받았던 모든 신비의 문턱에서부터 동정녀를 참으로 만났음을 보여준다. 신학적 접근을 시도함은 마리아를 찾고 우리 신앙에 적당한 자리를 내어드리기 위한 불가결한 첫 걸음이 된다. 따라서 신학적 접근은 그것으로 족하지 않고 마리아를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찾은 다음 우리 삶에서 영적 체험을 통해 그분을 발견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점에서 바오로 6세는 <<만일 크리스챤이 되고자하면 마리아론자가 되어야 한다. 즉, 마리아를 예수님과 일치시키고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하는 길을 열어 주시는 마리아의 본질적이고 생생한 섭리적 관계를 인정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4. 마리아론과 교의의 발전 마리아에 관해 프로테스탄트와의 일치를 위한 걸림돌이 되고 있는 주요한 난점중의 하나는 교의의 발전에 관한 문제로서 특별한 양식으로 마리아론에 있어서 첨예한 대립을 보이므로 여기에 한마디 언급하는 것이 적당하다. 1). 문제점 교의 발전의 문제는 혹은 Schillebeeckx의 말처럼 전승의 발전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한편으로, 문제를 까다롭게 만드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교 교리들이 오랜 세기동안 “변화”를 겪어왔다는 사실이다. 즉 예컨대 무염시태도리는 13세기까지 많은 성인들과 박사들로부터 토론의 대상이 되어왔고, 교황의 무류지권은 교회의 초세기에는 많은 호응을 받지 못했던 것같으며, 또한 7성사의 구체적인 항목도 중세기에 와서야 확정되었다는 사실 등. 다른 한편, 전승과 교도권의 가르침은 장엄하게 선포된다는 점이다. 계시는 교회의 사도들에 의해 한번 선언되면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교회의 “유산”은 결코 가감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써 교회의 “유산”과 모든 시대의 교회의 객관적 신앙간에 교리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사실과 대조되는 이러한 불변적인 이론은 이러한 폐쇄적인 고정된 이론과 교리의 진보적인 발전간의 괴리를 조화시킬 수 있는 대안을 요구한다. 여기서 객관적인 내용의 동질성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교회안에서의 이러한 내용의 발전적인 요소의 필요성도 명백하다. 2). 해결의 시안 교리발전의 문제는 위에 언급한 사실들을 조정하기를 모색하는 신학적 방법과 함께 시도하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다. 계시는 교회의 신앙적 동의에 맡겨져 있으므로, 교회와의 동일성 안에서의 계시의 발전은 교회의 신앙활동에 관계된 요인들과 함께 설명되어야 한다. 해결방안을 발전적으로 모색하려면 다음의 주제를 따라 풀어나가야 한다. 1. 인류에게 행해진 공적 계시는 그리스도로서 끝났다.(교의헌장 4항 참조). 2. 그리스도의 계시는 사도들의 증언에 의해 전적으로 증명된다.(교의헌장 7항 참조) 3. 사도들에 의해 전수된 그리스도의 계시는 교회의 신앙의 동의를 통해서만 전승의 대상이 된다(“신앙의 유산”)(교회헌장 10항 참조) 4. 교회안에서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느님에 의해 형식적으로 증명된 것뿐만 아니라 함축적인(묵시적인) 진리도 포함할 수 있다. 5. 교회안에서 받아들여진 계시에 함축된 것은 하느님에 의한 새로운 계시 없이도 밝혀질 수 있다 4, 5항은 특별히 발전되어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4항은 말씀의 분석을 전제한다. 그러나 마치 어떤 사람에게 자기 소견을 서로 나누는 것과같이, 모든 말씀은 반드시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함축적인 어떤 내용을 포함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계시의 환경에서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은 성부의 내적인 의향이다. 이를 수용하는 기관은 교회의 신앙이다. 5항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역동적인 본성 위에 기초한다. 이것은 묵시안에서 절정에 달하게 되는 대상의 보다 충만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긴장이 가로놓이게 된다. 계시에 형식적인 틀을 제공해 주는 예언자들은 환시를 촉진하는 전표가 된다. 이러한 계시진리들은 신앙의 역동성(dinamismo)에 의해 고양되는데 그러한 신앙의 역동성은 진리속에 파고들며 그 목적을 보다 잘 그리고 보다 완전한 방법으로 포착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르랭(Lérins)의 성 빈첸시오는(+450)는 ‘구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뉴만(+1890)은 발전하고 보다 완전하게 된 생생한 관념의 비유에 관하여 역설하였고, 성 토마스에 의해 영감을 받은 프란젤린(Franzellin)(+1886)은 묵시에서 현시로 넘어가는 인류과학의 발전의 비유에 관해 언급하였다. 또한 브롱델(+1949)로서는 묵시(implicito vissuto)로부터 인식할 수 있는 현시(esplicito conosciuto)로의 이행과정에 관하여 언급한 바 있다.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교의의 발전은 최후의 분석에서 교회를 일치안에서 양육하고 이끌어가는 성령에 의한 행위로 나타난다. 교의적 권위의 수행에 있어서 교도권은 신학자들이 그들 사이에서 교의의 논리적 연관성에 관해 일정기간 비판과 구성의 기간을 두고, 신자들이 교회의 공동체안에서 교도권에 의해 객관적으로 그들에게 넘겨진 계시적 유산의 실현가능성을 식별능력있는 무류적 신앙감을 통해 살아있는 신앙안에서 사도들의 교의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이들 어떤 요소도 고립적으로 분리해서는 교의적 발전을 위해 충분히 만족할만한 방법으로 타당성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카리스마를 가지나 모두가 공동선익을 지향하는 교회의 신앙적 유산을 심화하기 위해 중단없이 노력하고 이 모든 사항이 총체적이고도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에만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각자가 원하는대로 주고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러한 다양성의 복합적인 구조와 함께 교회의 내적 신비체안에서 신앙의 이해를 계속적으로 성장시켜 나가는 것은 오직 성령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발전을 이루는데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참된 신앙의 발전은 내적인 발전을 통해서 온다. 반대로 변질은 교리가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제 1편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에 나타난 마리아 “교의신학의 가르침에서 우선 성서적 주제가 제시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계시된 단순한 진리의 충실한 전수와 규명에 있어서 동.서방교회의 교부들의 견해가 학생들에게 교육되어야 한다....”(Optatam totius 16/807; 16/807; cf CIC, can. 252/3). 제 1장 성서상의 마리아 <<인류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놀라운 방법으로 제시한 성경은 구세주의 신비로 충만하고 또한 창세기로부터 요한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의심할 바 없이 구세주의 어머니요 구원사의 공동협력자이신 여인에 관한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가 점진적으로 마리아의 신비를 심화시키는 방법에 어떤 아이디어를 제안 할 수 있는 마리아론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획을 긋는 종합을 제시하고자 한다. 모든 교리와 특별한 국면을 통하여 점진적인 인식의 형성과정을 보다 상세하게 보기로한다. 성서가 마리아에 관한 상대적으로 적은 텍스트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차지하는 실질적인 비중은 크다. 그러나 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성서저자의 시각에서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그들이 품고 있는 모든 사상을 텍스트에 실어줄 필요가 있다. 성서안에서 이미 구원사에 있어서 마리아의 사명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발전되고 있음을 투시할 수 있다. I. 구약성서상의 마리아 1. 원복음(原福音:Protovangelo):창세기 3,15 구원의 첫 기쁜 소식이라 부른다. 원죄로 인한 원조의 타락이후 하느님은 뱀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와 여인사이에, 너희 후손과 그여인의 후손 사이에 원수가 되게 하리라. 여인은 네 머리를 밟을 것이고 너는 그여인의 발뒤꿈치를 물려고 하리라.” “후손(stirpe; zera:히브리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초기텍스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별적인 의미보다 집단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라운 신부의 주석처럼, “텍스트가 악의 힘을 대변하는 유일한 원수의 패배를 고려한 것이라면 승리자는 사탄의 권세를 물리친 권능을 지닌 한 사람이라는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다.” 70인역에서는 단어에 개별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중성대명사 대신에 남성대명사)로 번역하고 있다. 후손은 여인의 아들이 될 것이며 그 여인을 통하여 후손이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마지막 구절을 남성대명사로 시작하면서 이 승리를 일반적인 여인의 후손에게 돌리지 않고 여인의 아들들 중의 한 아들에게 부여한다. 이렇게 하여 많은 교부들이 주석하게 될 메시아적 주석이 마련되었다. 메시아와 함께 그 어머니도 개입되었다...” 유다전통과 후에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후손’을 메시아로 보았다. 메시아는 악마를 거슬러 확실한 승리를 가져온 역사의 유일한 인물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성요한복음에서 분명해진다. 예를들면 요한 12,31-32이다. “지금은 이세상의 심판 때이다. 지금의 이세상의 원리는 장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내가 땅에서 높이 들리게 될 때에 모든 것을 나에게 이끌어 올 것이다.” 제 4복음에서 예수의 전생애가 “이 세상의 원리”를 거슬러 행한 병영없는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이싸움은 갈바리아상의 예수님에 의해 이루신 승리에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브라운 신부가 말하듯, 제4복음사가가 원복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사실앞에 눈을 감고 외면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신약성서는 사탄을 그리스도에 의해 패배한 옛 뱀으로 표현하는데 이 싸움에 그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뜻에 의해 긴밀히 관여한다.(묵시 12,9;요한 12,31; 19, 25-27)” ‘여인’은 누구인가? 학자들의 의견은 여기서도 다양하다. J. Galot에 의해 제시된 주석은 신중하고 적합하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하와라고 하는 것이 적당하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마리아를 의미한다고 해야 하며 오히려 이러한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성서저자의 관심사는 뱀에 대한 승리에 있기 때문이다.” A. Roberto가 제시하듯이 하와 안에서 마리아의 형상을 볼 수 있다.이 비교를 통해서 로마 5,14과 1고린 15,22.45도 이를 반영한다. “하와가 인간 본성상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듯이, 마리아는 은총에 따라 그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될 모든 백성의 어머니가 된다. 모든 의인들은 그리스도의 강생 이전이든 이후이든 이 여인의 후손이 되며 이 여인은 바로 마리아이시다.” 교회 역사를 통하여, 그녀의 얼굴은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점차 드러나게 될 것이다. 때가 차자 하와를 조상으로 한 인류의 혈통의 강으로부터 온전히 거룩한 나자렛의 동정녀가 떠오를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새 하와 마리아는 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새 아담 그리스도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 태초부터 인류의 기다림은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하와의 딸들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 될 그 분께 연결되어 있다.” 2. 임마누엘의 어머니(이사 7,14) <<주님께서 그대에게 한 징표를 주시리라. 동정녀(Almah)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불리리라.>> 이 텍스트에서 “알마(Almah)”와 “징표(segno)”라는 두 단어의 의미를 주석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먼저 이를 밝혀야 한다. 1). 여기서 <<“Almah” 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동정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정녀라는 뜻으로 <>라는 단어가 있다. Almah는 동정일 수 있는 젊은 여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상세한 의미는 텍스트상으로는 명백하지 않다. 나머지 다른 구절에서도 이 단어가 발견되나 젊은 동정녀들에게 반드시 붙여지지는 않고 있다. 고대 유다 주석의 증거인 70인역 성서는 “almah”를 parthénos(동정녀)로 번역했다. 성마태오는 그리스도의 동정잉태의 소식을 전한다.(마태1,23). 로랑땡 교수는 이점을 받아 들인다. “마태오에게 동정출산에 대하여 언급하도록 미리 영감을 준 것이 이사 7,14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당혹한 사실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이사야의 신탁을 자주 인용했던 예수의 가족으로부터 유래된 전승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쉘클레도 “인용귀는 이미 기존하는 전승의 확신으로서만 사용되는 것같다.” 계시의 발전에 대해서는 더 열거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루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는데 두가지 텍스트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루가1, 26-31: “천사가 동정녀에게 파견되었다. 아들을 잉태하여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사야 7,14: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De Aldama는 “동정 모친성은 이사야 예언에서 사실로 드러나므로 “almah”라는 단어가 동정성을 필연적으로 의미하지 않는다할지라도 글르 배제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초대한다.” 2). 주님께서 너희에게 징표를 보여주리니,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 이 징표에 대하여 행해진 주석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어떤 학자들은 직접적인 메시아적 주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직접적으로 메시아를 예고한 것이라고 본다. 다른 학자들은 간접적인 메시아적 주석을 하고 있다.: 즉, 이사야 예언자는 아하즈 왕의 아들의 탄생을 예고했으나 예언은 그 직접적인 실현의 피안에 동정 마리아로부터 예수탄생과 함께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시로와 에프라임의 전쟁시기에 다윗왕조의 생존은 임마누엘인 히드키야의 탄생에 의하여 보장되었듯이 다윗의 혈통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느님으로부터 다윗후손의 견고성을 보장한다. 히드키아의 형상은 이사야 예어서에 많이 언급되었듯이(이사7,14-15; 8,5-10; 아마도11,1-9도)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이에 관해서 하느님은, “다윗의 왕권을 그의 조상에게 주어 야곱의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게 할 것이며 그의 왕권은 끝이 없으리라.”(루가 1,32-33; 2사무7,16비교)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완전한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 모두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고 하신 바 있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메시아적 출산에 관해서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이러한 주석들은 일치하고 있다.처녀(70인역성서는 동정녀라고 번역함)가 임마누엘의 어머니로서 구원사에 개입할 것이다. “역사상의 임마누엘 히드키아의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의 전표요 종말론적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다. 아하즈 왕 시대에 발생한 사건은 그리스도의 동정잉태의 신비안에서 완전히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 신약성서는 구약을 극복하며 이를 완성한다.” 3. 베들레헴의 출산(미가 5,1-2) 이사야 7,14은 주전 736년경에 씌어졌다. 미가서는 그보다 약간 뒤인 주전 701년경에 저술되었다. 미가는 미래의 메시아의 다윗왕조의 기원에 관하여 강조한다.: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미가5,1). 복음사가들은 여기서 메시아의 탄생장소를 보았다.(마태 2,6; 루가 2,4이하).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여인이 아이를 낳을때까지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미가 5,2).여기서 메시아의 어머니의 동정성에 대해서는 전혀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 하지만 “미가 예언자가 30여년전에 이사야가 선언한 “almah”(이사 7,14)라는 유명한 신탁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4. “시온의 딸”과 새 백성의 탄생 미가서(1,13; 4,9-10)에서 이미 언급한 “시온의 딸”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Resto)>>을 모으고 새로운 희망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북부지역(예루살렘 전역이 아니라)이다.:시온의 딸은 고통스런 출산으로 백성을 해방시킨다. 스바니아3,14 이하에서도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미가서와 같이 시온이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기타 지역을 가리키며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을 기쁨으로 초대한다. 왜냐하면 남은자는 마침내 승리하여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즈가리아서(9,9)와 요엘서(2,21-27)에도 마찬가지 내용이 나온다. 시온의 딸은 메시아적 실현에서 야훼의 직접적인 협력자로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이사야는 시온의 딸이 시대적으로 뒤에 옴을 말하고 있다(비교 49,20; 54,1-3; 66,7-8...) . 마리아는 이 예언을 자신 안에서 실현한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적 백성의 기쁨의 출산이 있었고 갈바리아에서 고뇌의 출산이 있었다(요한 16,21; 19,25-27; 묵시 12 참조). Spinetoli의 P. Ortensio가 잘 지적하였듯이 “갈바리아에서도 마리아는 메시아의 어머니, 구세주의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중단없이 계속하고 시온의 딸로서의 이미지를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실현하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그녀에게 부른 통칭 “여인이여(donna)”라는 말은 원복음(창세 3,15)의 “여인”(donna)보다도 구약의 신탁의 이상적 시온 곧 이러한 절정의 순간에 비인칭으로 호칭함으로써 메시아적 공동체의 형상을 상기시켜준다.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탄생과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탄생을 준비하는 고통(시온의 딸의 출산을 위한 고통)은 <<영광스런 메시아와 새 하느님 백성을 준비하는 고통(시온의 딸의 출산 고통)은 마리아가 아들을 따라 인류의 이름으로 공동체적 구원을 위해 치른 대가이다>> . 또한 H. Cazelles도 <<성서본문은 시온의 딸의 신비와 시온-예루살렘의 고통의 신비를 일치시킨다. 이 모든 본문들은 하느님 백성안에서 신성한 풍요로움의 신비에 관해 논급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그 중에서도 시련받으면서도 은총에 의해 감사하고 활기에 넘치는 ‘남은자’안에서 활동하신다. 마리아 안에서 이러한 은총은 고난받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아를 통해 마리아에 의해 사도들의 새 백성을 탄생시킴으로써 완성되었다.>> 고 말한다. 마리아는 시온에 연결된 성서적 이미지를 자신 안에서 긍정한다. 이는 일종의 이스라엘로부터 교회로의 전이과정이다.: <<마리아는 ‘시온의 딸’로 대표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기다림이라는 구약의 신비를 실현시킨다. 즉 동정녀의 성소는 시온의 딸의 이미지로부터 예표되었듯이 교회적 차원을 갖는다.>> . 교회일치적 특성의 중요한 관찰은 이것이다. “<<시온의 딸>>이라는 주제는 프로테스탄트의 주석에 의해 먼저 밝혀진 바 있지만, 신구약성서와 마리아론적 문제로부터 발생한 초교파적 대화에 기초한 성서신학을 깊여나가는 지평을 열었다.” 5. 마리아를 표현하는 상징들 <<마리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성서본문은 매우 드물지만 상징과 예표로 그 녀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는 문구는 적지 않다>> . 몇 가지만 열거하면: - 떨기나무(출애 3,2):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 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 이는 동정녀가 잉태하여 동정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아들을 낳으리라는 마리아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천주의 모친이시여, 모세가 본 가시덤불 속에서 우리는 당신의 동정성을 보았사오니...>> - 기드온의 양털뭉치(판관 6,37-38): <<기드온이 이르기를, “보십시오. 제가 타작마당에 양털 한 뭉치를 이렇게 펴 놓았습니다. 만일 이 양털뭉치에만 이슬이 내리고 땅바닥은 말라 있으면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을 제손으로 구하시려는 줄로 알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다. 기드온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양털뭉치를 짜보니 한 대접 가득 물이 나왔다.>> 이는 마리아가 하늘로부터 천주성자를 받았음과 같다. <<당신은 유일한 방법으로 동정녀로부터 낳음을 받으셨을 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양털 위에 이슬방울 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서말씀을 이루셨도다.>> - 계약궤(출애 25, 10-22): 이는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요; 마리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이다. 계약궤는 부패되지않는 나무로 되어 있었으나 마리아의 몸은 무덤의 부패로부터 보존되었다. 예수승천 대축일 전야미사는 제 1독서(1고린 15, 3-4. 15-16; 16, 1-2)에서 하느님의 성전에서 계약궤의 이동에 관한 내용을 읽고 이어서 계약궤 축제를 위해 읊조리는 시편 132편을 화답송으로 노래한다. 성모 호칭기도에서 마리아는 <<계약의 궤>>로 불리어진다. - 아가의 신부:( <<아가씨들 가운데서 그대 내 사랑은 가시덤불 속에 핀 나리꽃이라오.>>(아가 2,2): 즉, 신랑은 신부(마리아)를 나리꽃(백합)에 비유한다.; <<나의 귀여운 짝이여, 흠 잡을 데 하나 없이 아름답기만 하여라.>>( 아가 4,7) 무염시태 대축일(12월 8일) 제 2 저녁기도 후렴 1은: <<마리아여, 당신은 온전히 아름다우시고 원죄에 물 듦이 없나이다.>>고 노래한다. 무염시태라는 용어보다 더, 아가서 4,7에서 인용한 옛 주제를 선호하고 이 귀절을 전례적으로 즐겨 사용한 것은 ‘아가는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관한 고대성서신학의 완성’이라 한 A. ROBERT(Le Cantique des Cantiques, Gabalda, Parigi 1963)의 사상을 고려한다면 그 가치를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명백하게 과장된 표현인 <<당신안에는 흠도 티도 없나이다>>라는 표현은 마리아의 무염시태로 시작되는 이러한 새창조에서만 문자그대로 실현된다. 이러한 의미는 풍부한 전통으로부터(비록 자주 부족한 형태로나마) 받아들여질때라야 비로소 객관적으로 실현될 수 있으므로, 신학자는 기초로부터 성서의 원 저자인 하느님의 계획에 응답하는 충분하고도 초월적인 의미를 내다 볼 수 있다. “아가”에는 아직도 전례상 마리아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내용이 풍부하다. <<그대, 나의 짝은 디르사 처럼 아름답고 예루살렘 처럼 귀엽구나>>(아가 6,4) 에서 마리아를 예표한다고 볼 수 있고, <<새벽별처럼 떠오르는 그는 누구인가?>>(아가 6,10) 에서 마리아는 참태양이신 예수를 앞서온 새벽별에 비유되며,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봉해둔 샘이로다>>(아가 4,12) 에서 닫혀진 정원과 봉해둔 샘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할 수 있다. - 잠언 8,22-36: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모든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 땅이 생기기전, 그 옛날에 나는 이미 모습을 갖추었다. 깊은 바다가 생기기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그러니, 이제 아들들아 내말을 들어라. 내가 일러준 길을 따르면 복 받으리라. 교훈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대로 따르면 지혜를 얻으리라...... 내말을 듣는 사람은 복 받으리라. 나를 얻으면 생명을 얻고 야훼의 은총을 받는다. 나를 붙잡지 않는 자는 제 목숨을 해치게 되고 나를 싫어하는 자는 죽음을 택하는 자들이다.>> 이 내용은 인격화된 지혜를 표현한다. 신약의 많은 귀절들이 육화된 지혜, 하느님의 아들을 제시한다. 전례는 이 내용을 마리아에게 적용한다. 마리아는 육화된 지혜, 신적사고에 일치되고 영원전부터 하느님의 모친이 되도록 예정되었다. 그밖에도 구약의 많은 인물들이 마리아의 전표로 보여진다. -. 사라: 이사악의 어머니; 하느님은 이사악의 탄생을 예고하는 자리에서 <<주님께 불가능한 일이 있겠는가?>>(창세 18,14)라고 하신 말씀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가 1,37)고 한 내용과 대비된다. -. “사라와의 관계보다 아브라함과 마리아 사이에 훨씬 더 많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약속의 아들 이사악의 탄생과 마리아의 거룩한 아들 예수의 동정잉태에 관하여 특히 그렇다. 옛계약의 신앙의 사람 아브라함은 새계약의 우리 신앙의 여인 마리아의 신비에 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우리들의 신앙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즉 아브라함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12,3). 그리고 <<아브라함은 강대한 민족이 되고 세상 민족들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복을 빌 것이 아닌가?>>(창세 18,18). 또한 <<네가 이렇게 내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8). “아브라함이 <<나의 주님 제가 당신 눈앞에서 총애를 받을 수 있다면,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창세 18,3) 한 것 처럼, 마리아도 하느님곁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루가 1,30:<<...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너를 축복하는 자들을 내가 축복할 것이요,...너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종족은 강복을 얻으리라>>(창세 12,3); <<땅의 모든 민족들이 저로 말미암아 강복을 얻으리라>>(창세 18,18);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너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강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소리에 순종한 상급이니라>>(22,18)]. 마리아도 모든 백성을 위한 축복의 원천이 되시고 그 자신이 가장 복된 분이 되셨다[<<...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루가 1,42); <<이제부터는 온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루가 1,48)]: 또한 아브라함처럼[<<아브라함이 야훼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덕으로 삼아 주셨다>>(창세 15,6)],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성령에 의해 기적적으로 낳으리라는 약속을 믿었으므로 칭송을 받았다[<<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의 이사악 제사에 관한 내용이 소개된다. 본문의 실제 내용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구원적 희생의 전례의식을 정당화한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하느님께 속한다. 그러나 단지 희생제사가 아니라 구원적 희생제사인 것이다(출애 13,11). 교부들은 이사악의 제사에서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형상을 보았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오르는 것과 같이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고(루가 2,22 이하 참조), 갈바리아에도 참여할 것이다(요한 19,25-27). “이런 점에서 마리아의 전형을 만날 수 있는 인물을 성서에서 찾는다면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조건은 서로 다르다. 은총의 수여가 다른 질서 아래 이루어졌다. 즉 희생제물로 봉헌되는 아들은 하느님의 섭리와 흠없는 사랑에만 의탁한채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화형당하러 걸음을 묵묵히 걷고 있다. 이는 곧 갈바리아에 오르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한나, 사무엘의 어머니: 아들 사무엘을 점지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노래를 불러 드린 것은 마리아의 마니피깥의 전형이 되었다.(1사무 2). - 유딧(유딧13,18-20): <<당신은 이 세상 어느 여자 보다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앞에서 복 받은 여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시리아 왕 느부갓네살의 총사령관인 홀로페르네스를 살해하고 돌아온 유딧에게 이 승리의 노래를 불러준다. 이 노래는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행한 찬사와 같다(루가 1,42:<<동정 마리아여,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십니다>>). 도움이신 마리아를 경축하는 미사의 입당송에서 유딧서 13장 19절을 인용한다. <<당신의 찬미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의 권능이 영원토록 길이 기억 될 것입니다.>> -. 판관기 4,17-22: 야엘이 적군 시사라를 죽이자, 이스라엘 백성은, <<켄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여, 어느 여인 보다 복을 받으라.>>(판관 5,24) 고 하여 루가 1,42의 전형이 된다. -. 에스델 왕비(에스델 4장 이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중재 역할을 담당한 에스델은, 마리아의 인류를 위한 중재 역할의 전조가 되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마리아에 관한 내용의 요약 앞에 언급한 모든 본문중에 가장 중요한 것들은 물론 창세기3,15, 이사야 7,14, 미가 5,1-2 및 <<시온의 딸>>에 관한 주제 등이다. 이들에 관해서만 교회헌장 55항이 강조하고 있다. 이들에 관하여 Le Déaut의 다음의 설명은 일리있는 내용이다. “마리아론은 구약성서를 탄력적이고도 적절한 의미로 동정녀에게 적용할 이미지의 보고로서 고려하는데 제한이 있을 수 없다. 구약의 계시자인 신약성서와 교회의 전통적인 설명에서 명백히 서술된다할지라도 메시아의 어머니에 관해 정통 계시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점에 관하여 교회헌장 55항은 가톨릭 주석을 위한 기본적인 원리를 재천명한다. “교회에서 읽혀졌던바 있고 궁국적이고 충만한 계시의 빛에 의해 알려졌던 바 있는 이들 초기 문헌들...” 신적 계시에 대해서는 사목헌장 10항을 소개해야 할 것이다. “성전과 성경, 교회의 교도권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가장 지혜로운 의향을 통하여 그들 사이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그와같이 연결된 관계에 있다.” P. Bea가 잘 말해주듯이, “가톨릭 교의전통의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자는 무한한 지혜와 선을 지닌 하느님이 성서안에 보장하고 있는 모든 보화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로랑땡은 “마리아론의 완전한 교의는 생생한 환경인 교회전승안에서 성서를 읽을 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래서 성서를 성서 자체에만 도달하기 위해 이러한 교회전승을 거부하는 사람은 성서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고 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마리아의 사명이 될 내용의 초안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는 말로 결론지을 수는 없다. 실현된 사건에 관해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아 구약은 메시아와 하느님의 새백성에 관하여 마리아의 모성을 직관하였다고 긍정할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원리 다음으로 교회헌장 55항은 “이들 초기 문헌들은 한 여인의 형상 즉 구세주의 어머니를 점차적으로 보다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오로 6세가 언급하듯이, “성서는 인류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놀라운 방법으로 제시하면서, 구세주의 신비에 젖어 있고 창세기로부터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의심없이 구세주의 어머니와 협력자라는 지위에 대한 언급을 내포하고 있다.” II. 신약성서의 마리아 1. 성바오로 서간 이방인의 사도 성 바오로는 십자가에서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해 그의 메시지를 집중하고 있다. 그의 서간에서 예수의 어머니는 단 한번 언급된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어 여인의 몸에서 나게 하셨다>>(갈라 4,4). “ ‘여인에게서 태어났다’ 함은 참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본문은 또한 동정녀 출산의 관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교부들과 루터와 칼빈까지도 현대주석의 수작들의 많은 내용들이 동정출산의 의미에서 이 본문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사도가 다른 아버지를 지명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동정출산을 암시하고자 했다고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에게 인간의 살을 수여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민족(이스라엘)과 진실로 연대할 가능성을 그에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바오로사도가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의 어머니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내용이다. 그가 증언한 내용으로부터 그밖의 모든 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 . 사실상 Geiselmann 은 공관복음이 씌어지기 15년전인 54년에 씌어진 갈라디아 서간의 주석과 함께 마리아의 성서적 의미에 관한 그의 논문을 시작하였다. 교의적 관점에서 갈라디아서 4,4의 선언은 설령 그 중요성이 과거와 현재의 많은 신학자들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약성서에서 마리아론적으로 보다 의미심장한 본문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바오로사도와 함께 그는 마리아의 신적모성의 증명과 그의 의미의 구원사적 고려라는 첫직관을 통하여 마리아론과 그리스도론과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 2. 마르코 복음 마르코 복음은 가장 오래된 복음서로 70년 경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중요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공생활과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집중되어있다.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의 어머니에 관한 두 개의 본문만이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본문은 한때 <<반 마리아론>>적 근거로 잘못 지적되었던 바 있다. -. 마르 3,31-35(cf. 마태 12,46-50; 루가 8,19-21): <<누가 내 어머니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다>> 그리스도의 가족은 보다 광범하여서 혈연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예수님의 응답은 다만 혈연으로 맺어진 어머니와의 유대를 내세우려 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형제애를 시작하는 차원으로 고양시키고자 하신다. 거기에서 사람은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제 마리아는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포함되며 전적으로 협력할 마음과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다. 마리아의 위대성은 그 분의 육적인 모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뜻을 충만하게 실현하신 점에 있다. 마리아는 이 점에서 보다 깊은 의미에서 어머니이신 것이다.>> 11월 21일 성모 자헌 축일에 이 복음이 읽혀진다. 같은날 성무일도의 독서의 기도 제2독서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혹시 동정마리아께서 성부의 뜻을 준행하지 않았습니까? 준행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 아버지의 뜻을 확실히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로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생각하셨다>> 이 마르코 복음의 본문은 마리아의 위대성을 생리학적 관점에서 혈육의 모친이라는 점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덕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한다. -. 마르 6,1-6: 놀란 나자렛 군중들과 의심많던 사람들이 예수에 관하여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인 목수가 아닌가?>> 라고 의아해 한다. 마르코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라 칭한다(마태 13,55에서는 “목수의 아들”이라 한데 반해서). “마르코의 이 표현은 예수의 동정 출산에 보다 주목을 한 것 같다.” “마르코의 복음에는 예수의 유년시절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는 사실로 보아 마르코는 에수가 인간의 자연 본성적인 잉태-출산의 일반적인 경로를 따라 태어났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예수의 아버지로서 어떤 남자도 상정할 수 없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의 본문에서 소개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난처하고 어색한 탈선임과 아울러 중심관점을 벗어난 논외의 설명이 될 것이다.” 3. 성 마태오 복음 마태오복음의 결정적인 집필연대는 8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마태오는 예수의 족보를 제시함으로써 복음을 시작한다. 그리고 성령의 작용을 통한 마리아의 동정잉태를 분명히 한다. <<000는 000를 낳고....>> 의 정식에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다>>(마태 1,16) 고 기술하고 있다. -. 마태 1,18-25: 약혼녀 마리아의 잉태 사실에 요셉은 당황한다. 그러자 천사가 꿈에 나타나 성령으로 인하여 마리아가 잉태하였음과 곧 태어날 아들의 참본성, 즉 그 분의 임무는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메시아적 사명을 계시해줌으로서 요셉의 궁금증이 풀렸다. 마태오는 구약성서를 통독하였고 이사 7,14 의 예언이 실현됨을 확신했다. -. 마태 1,25: 마리아는 <<요셉을 알지 못하고서 예수라 불리는 아들을 낳았다>>. 희랍어본에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요셉이 마리아를 몰랐다: non la conosceva, finché diede alla luce..)”고 번역하고 있다. 성서언어에서 << ... 까지는>> 이라는 <>라는 단어는 과거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나, 그러나 그 다음에는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확신을 돕기 위해서 시편 110, 1(“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과 2사무엘 6, 23...이하(“그 뒤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 ) 등을 참조할 수 있다. -. 마태 2,1-12(동방박사의 방문)에서 2장 11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집에 들어가 그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부복하여 경배하였다>>(11절). 여기서도 요셉이 빠진 이유는 마리아가 요셉을 알지 못하고 잉태하였다는 것, 즉 마리아의 동정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고대시대에 특히 셈족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한다면 아버지에 대한 아무 암시도 없이 어머니만을 언급한다는 것은 이 여인을 다른 모든 여인들과 구별하여 현양하기 위한 조직적인 의도가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4. 성 루가복음 요한복음과 함께 마리아에 관해 보다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소식으로 구성된다. 루가는 마태오와 다르게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긴다. 수태고지(受胎告知:루가 1,26-38): 천사는 마리아에게 인사한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마리아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여기서 <<기뻐하여라(28절)>>(rallegrati) 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메시아적 기쁨에로의 초대이다. 이 귀절은 스바니아 3,14-15 과 대비된다:<<시온의 딸아, 기뻐하여라. 이스라엘의 왕이 너희 가운데 주님이시다.>> 또한 즈가리아에게 한 말과 유사하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또한 기뻐하리라>>(루가 1,14). 메시아적 구원이 다가오고 있다. <<은총이 가득하신>> 은 문자적으로는 <<당신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채워져 있다>> 는 뜻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는 구약의 성소의 부르심의 정식이다.(예: 출애 3,12; 여호 1,5-9; 판관 6,12; 예레 1,8; 15-20) “주님께서는 무엇인가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어떤 사람과 함께 계신다: 그 사명을 부여하며 이를 완수하기 위해 너와 함께 있겠다. 이 표현은 “주님께서 너와 함께 행하시고자하는 바를 완수하시기 위해 그의 직무에 너를 뽑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가 당황하자, 천사는 그녀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30절). 스바니아 3,16(“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에도 같은 정식이 보인다. <<두려워 말라>> 는 표현은 구약의 모든 천사 발현시에 쓰이는 표현으로서 공포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앞에 설때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이는 이사 7,14(<<이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과 대칭된다. 루가 복음사가는 교회의 역할을 담당할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한다. 즉 아들의 이름을 붙이는 권한을 마리아에게 준다. 즉 이는 마리아가 아들 메시아의 구원사업에서 담당할 역할을 수여함과 같다. 이는 곧 ‘셋’에 이름을 붙여주는 하와의 이미지와 같고(창세 4,25), 세례자에게 이름을 지명하는 엘리사벳과 같다(루가 1,60). 마리아는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루가 1,31), 교회가 이를 구세주라고 고백한다(사도 4,12). 천사가 이르기를: <<(그분은) 위대한 분이 되어 지존하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윗 왕권을 주고 야곱의 가문을 영원토록 다스리리라.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32-33절). 이 구절은 2 사무 7,12-16(<<그의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될 것이다>>)의 반향이다. -. 마리아는 동정인 자신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나는 남자를 모릅니다>>(34절). 이는 방법을 묻는 것이지 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창세 15,8) 과 기드온(판관 6,15) 의 경우와 유사하다. 천사의 대답은, <<성령께서 너에게 내리시고 지존하신 분의 권능이 그 그늘을 네 위에 드리우시리라>>(35절) 고 하였다. 이는 출애굽기 40,34(<<구름이 회중의 천막을 뒤덮고 주님의 영광이 그 거처를 채우셨다>> 와 대비된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요구하신 것은 지존께서 내린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마리아와 우리를 위해 주실 성령과 생명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요한 6,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마리아는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과 같은 말씀, 만세전부터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을 받아들이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즉 마리아는 “그분을 태중에 잉태하리라”는 하느님의 요청앞에 놓여있다. 마리아는 말씀의 참된 의미에서 그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신앙안에서 마리아는 말씀이신 분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온 인류는 이 순간 숨죽이고 마리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성 벨라도). 마리아의 응답은 그녀에게 명백하고 사려깊은 응답을 기다리는 분에게 인격적이고 겸손하고 자유로운 “예”(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소서”) 였다. 마리아는 그분의 Fiat 과 함께 육화의 중재자가 된다. 거룩한 말씀과 인간 본성간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지성소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곧 ‘말씀’이 인간의 살을 취하신 장소가 마리아가 된 것이다. 이는 온인류가 마리아의 육신적 인격적인 존재로 인해서 하느님께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 사건이다.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모든 인간적 요소는 마리아로부터 받았다. 그 분 안에서 전 피조물이 그 최상의 열매를 주기위해 모아진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성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는 것이다. 또한 이미 인류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 분의 모친이 되신 것은 동시에 마리아께서 구원된 인류의 어머니가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신비체의 머리의 어머니는 신비체의 지체의 어머니도 되기 때문이다. 구원경륜에 있어서 마리아의 사명은 영보때 Fiat 에서 그 뿌리를 내린다. -.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루가 1,39-56) 성 루가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계약의 궤로 받아들인다(참조: 2사무6,1-11; 1고린15,3-16,2). 궤와 마리아는 유다 지방에서 그 의미가 고양된다. 계약궤가 백성의 기쁨이듯, 마리아는 세례자에게 기쁨을 제공한다. 다윗은 <<어떻게 주님의 궤를 내집에 모실 수 있겠는가?>>(2 사무 6,9) 하였으며,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가 2,43) 하고 황송해한다. 주님의 궤가 오베데돔의 집에 석달 머물렀다. 마리아도 엘리사벳의 집에 석달 가량 머물렀다(루가 2,56). 계약궤가 하느님의 신비로운 옥좌라면 마리아의 태는 육화된 하느님의 육체적인 옥좌이다. 부패될 수 있는 나무로 만든 궤가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면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몸은 부패로부터 안전히 보존되고 천사들과 복된 영혼들의 환호속에 천상 도시에 옮겨질 만한 것이다>> . 여기서 성모승천대축일 전야미사에서 전례는 위에 언급한 역대기 상권을 신자들의 묵상재료로 제시한다. -. 엘리사벳의 찬미: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십니다>>(42절). “루가가 마리아에 대해서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십니다.”라고 말할 때 마치 아브라함에게 행해진 언약 안에서 구체화되듯이 그는 하느님의 축복의 모든 역사를 반향한다. <<너는 축복이 되리라. 지상의 모든 가정들이 네안에서 복을 받으리라>>(창세 12,2-3). 하느님의 축복은 성령의 선물과 같이 신약의 그리스도의 시대에 완성된다. 하느님은 영원히 자신을 내어주시며 살아계신다. 마리아를 “홀로 복되시도다” 라고 선언하는 것은 마리아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선물과 성령의 활동의 탁월성을 선언하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 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45절). 루가가 우리에게 마리아의 첫 인상으로 제시한 것은 <<믿음의 여인>> 이라는 이미지다. <<이제부터 만백성이 나를 복되다 일컬을 것이다>>(루가 1,48). 그이유는 마리아자신의 믿음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메시아의 기쁨”이다. 루가가 말한 기쁨은 <<성령과 기쁨이 마리아의 태중에 살아계신 예수님으로부터 엘리사벳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메시아의 선물과 그분의 도래와 연결된 은총의 선물이 마리아를 통해 오신 것이다. 마리아의 엘리사벳방문은 요한을 통해 선포된 바를 완성하도록 에수님께 맡겨졌음에 대한 마리아의 신덕을 드러낸 것이다.:”그분은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다.”(루가1,15). 이 방문중에 무엇보다도 괄목할 사실은 세례자 요한은 예언적 도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두 어머니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두 아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충실한 봉사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엘리사벳은 ‘소리’(voce)로서, 마리아는 ‘대변인’(portatrice)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 마니피깥: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부분은,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인격적인 찬미(46-49)로서, 모든 귀절이 구약에 상응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둘째부분(50-53)은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태도가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작은 영혼들에게 대하는 태도와 같은 선상에서 기술한다. 셋째부분(54-55)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행하신 성서적 약속들이 마리아 안에서 실현됨을 보여준다. “신앙의 시선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을 주인이요 구원역사에서의 안내자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녀로하여금 하느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주도하시는 방식들에 대해 관상하게 해준다. 그분은 지상의 권력자들에 의해서 무시당하는 겸손한 영혼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들어 높이신다. 마리아는 바로 이들 무리 중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분은 비천한 여종의 신세를 돌보셨다. 전능하신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다. 마니피깟에서 피조물은 하느님 안에서만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며 이 표현에 따라 성바오로는 아브라함과 예언자들 시편작가와 신약의 신자들의 신앙의 영성을 요약한다(로마3,27;4,1-8;1고린1,29-31;2고린10,17;에페2,9).” <<이 노래는 마리아의 뛰어난 기도이다. 메시아 시대의 빼어난 노래로서 이로써 옛 이스라엘과 새 백성 이스라엘의 용약함이 만나는 점이다>>(바오로 6세). <<마리아의 마니피깥은 메시아를 나타내는 아브라함의 환호와 예언적으로 교회의 목소리를 다시 울려 퍼지게 한 환희가 만나는 곳이다>>(이레네오). “마니피깥은 모든 시대에 모든 교회의 기도요 모든 백성의 기도가 되었다. 그 안에 감히 도달하기 어려운 마리아의 웅장함의 비결과 헤아릴 수 없는 그 분의 자기 낮춤의 비결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노래속에는 아직도 두가지 점이 더 드러나 있다. 생생한 선민의식과 이러한 역사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는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보다 투명한 겸손을 발휘할수록 이러한 의식은 더욱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48절): 이 구절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연상케한다.(루가18,9-14) 거기서 예수님은 당신 어머니의 말씀을 재확인하시며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4절)고 하셨다. 성 야고보는 “하느님은 교만한 자를 내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야고4,6)고 하였다. “마니피깟은 마리아의 영혼에 보다 충실한 거울이요 도달할 수 없는 위대성과 헤아릴 수 없는 자기낮춤의 비밀이다. 만일 그녀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높아졌다면 그녀는 자기 백성의 역사상 마지막 자리를 차지할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리아의 덕행을 본받도록 초대된 모든 신자들은 이 노래, 곧 가난한 자의 노래요 참 신앙인의 노래를 부르고 실천하도록 초대된 것이다.” -. 예수의 탄생(루가 2,1-19) 마리아의 출산은 매우 능동적이다. 예수님을 탄생시킨 것은 그녀이다. 특별히 “종말론적 기쁜소식인 구세주가 처음으로 마리아와 어떤 방법으로건 관련되고 분리될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능동적인 역할은 그녀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구세주를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눕힌 것은 다름아니라 마리아였으며 목동들이 이러한 징표로부터 그를 알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신 분이 세상에 봉헌된 것은 마리아를 통해서였던 것이다.” -.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다(루가 2,22-35)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서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갔다...”(22절). 그리스말인 ‘봉헌’(parastesai)이라는 단어는 신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희생적 가치를 지닌다. 예컨대, 성 바오로도 로마신자들에게 <<살아계신 성체처럼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자비를 통하여 봉헌하기를 권면합니다>>(로마 12,1) .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당신의 아들은 반대 받는 표적이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당신의 영혼은 예리한 칼에 찔릴 것입니다>>(루가 1,34-35) 고 예언하였다. “이스라엘을 관통할 예리한 칼은 예수님의 설교말씀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있어 걸림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내도록하고 살에서 뼈를 발라내듯 마음속에 감추어진 온갖 불의를 지적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그 백성의 배척으로 인해 받게되는 어머니로서의 고통이란 의미에서 이 칼은 마리아의 영혼을 관통할 것이다. 이 고통은 마리아께서 십자가에 반대받는 표적으로 달려있는 당신 아들 앞에 서 계실 때 절정에 이른다.” E. Manfredini는, “이 한 칼날의 상징은 마리아의 죽음의 고통을 표현하며 또 한편으로 하느님의 심판때의 메시아적 공동체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는 예언적 시련들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형상은 역사과정을 통해 보아오듯이 주님을 거부하고 박해하는데 대한 크리스찬 공동체의 운명을 압축하여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이 시메온의 예언은 요한 19, 25-27 에 나타난 갈바리아에서 마리아에게 실현된다. 즈가리아12,10의 <<내가 다윗 가문과 예루살렘 성민들에게 용서를 빌 마음을 품게 하리니 그들은 내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일을 외아들이나 맏아들이라도 잃은듯이 슬퍼하며 곡하리라>> 라는 예언이 갈바리아에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갈바리아에서 마리아가 겪은 이 슬픔은 하느님의 새백성이 구세주의 죽음때문에 슬퍼하게될 것을 예표한다. 시메온 예언자가 요셉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이 마리아에게만 이 예언을 한 것은 마리아가 메시아의 어머니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예외적인 방법으로 탁월한 위치에서 협력하게 될 것임을 드러낸다.” P. Ortensio da Spinetoli는 다수 학자들을 인용하면서, “모든 학자들은 이 선언이 마리아의 생애와 아들의 구원적 희생에의 자신의 개인적 협력에서 갖는 특별한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고 결론 내린다. 바오로 6세는 그의 사도적 권고인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 예수의 성전에서의 봉헌을 주석하면서, 마리아를 <<봉헌된 동정녀>>라고 칭하면서 <<성전에서의 봉헌사건이 여러 면에서 십자가의 구원사건에로 지향된 구원의 신비>>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교회는 특히 중세기로부터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아들을 안고 가는 동정녀의 마음에서 봉헌의식의 일반적인 의미를 초월하는 제헌의지를 직관하였다. 다음과 같은 성 베르나르도의 열정적인 감탄어조 안에서 이러한 직관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동정녀시여, 당신의 태중의 복되신 아들을 성전에 봉헌하소서. 우리 모두의 화해와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하소서!>> . -. 성전에서 박사들 사이에서 토론하고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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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연중 18주일(이사55,1-3; 로마8,35-39; 마태14,13-21)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21 연중 21주일(이사22,19-23; 로마11,33-36; 마태16,13-20)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20 연중20주일(이사58,1-7; 로마11,13-32; 마태15,21-28)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19 연중19주일(열왕19,9-13; 로마9,1-5; 마태14,22-33)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18 연중 제17주일(1열왕3,5-12; 로마8,29-30; 마태13,44-52)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17 연중 16주일(농민주일: 지혜12,13-19; 로마8,26-27; 마태13,24-43)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16 연중 15주일(이사55,10-11; 루마8,18-23; 마태13,1-13)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 마리아론1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14 연중 14주일(이동축일:성 김대건 안드레아신부 대축일)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13 연중 13주일(교황주일: 열왕4,8-16; 로마6,3-11; 마태10,37-42)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12 남북 통일기원미사(신명30,1m5; 에페4,29-5,2; 마태18,19-22)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11 연중 11주일(출애19,2-6; 로마5,6-11; 마태9,36-10,8)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10 연중 제 10주일(호세6,3-6; 로마4,18-25; 마태9,9-13)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09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신명8,2-16; 1고린10,16-17: 요한6,51-58)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08 삼위일체 대축일(출애34,4-9; 2고린13,11-13; 요한3,16-18)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07 성령강림대축일(사도2,1-11; 1고린12,3-13; 요한20,19-23)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06 부활7주일(예수승천 대축일: 사도1,1-11; 에페1,17-23; 마태28,16-20)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05 부활6주일(사도8,5-17; 1베드3,15-18; 요한14,15-21)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04 2002년5월 첫성시간; 성모의 밤 강론(2002.5.2)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103 부활 5주일(사도6,1-7; 1베드2,4-9; 요한14,1-12)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 200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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