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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 강론 성지주일 오늘 그리스도는 조랑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남 앞에 자랑하고 으시댈 줄 모르는 그리스도께는 걸맞지 않는 모습처럼 보인다. 왜 그러셨을까? 그러나 조랑말 나귀의 모습은 예수님과 오히려 잘 어울린다. 경마는 화려하고 호화찬란하지만 나귀는 별 볼품도 없고 화려한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다. 또 말은 사람이 타면 전속력을 다해 달리고 싸움터에 나가거나 경쟁에 이기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지만 나귀는 사람이 타면 그저 타박타박 걸을 뿐 싸우거나 경쟁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 더구나 새끼 나귀이니 수줍은 듯 그저 귀엽게 촌색시마냥 타박타박 걸을 뿐이다. 예수님께 더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더구나 한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은 애띤 나귀 새끼이니 희생양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는 제격인 셈이다. 애잔하게 슬퍼 보이기까지 한다. 군중들의 환호소리, 호산나를 외치며 빨마가지를 들고 옷을 벗어 길에 깔며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군중들의 환호는 마땅하고 지당한 환영이다. 그러나 이 환영이 얼마가지 않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으로 바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환영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께 대한 환영이라기 보다 경마 타고 경기장에 등장한 장군이길 원하는 군중들의 경쟁심과 현세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순수하지 못한 환영이었다. 임금이 되어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주실 원하는 욕심 많은 백성들의 환영이었다. 그러나 평화의 왕으로 나귀타고 수줍은듯 입성하시는 주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실망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평화의 왕이요, 구세주로 오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태도에는 천차만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빌라도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는 분명 그리스도에게서 아무 잘못도 죄목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군중들의 악다구니와 같이 외쳐대는 군중심리가 두려워 죄없는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내맡긴다. 용기 없는 비겁자의 상징으로 세말까지 남을 것이다. 다음으로 헤로데 왕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자기 왕권의 경쟁자로 그리스도께 대해 라이벌의식을 갖고 시기 질투심에서 그리스도 처형의 공범이 된다. 시기 질투심의 원조로 그 이마에 새겨질 것이다. 군중들 틈에 낀 예루살렘 부인들. 그들은 통곡하며 예수님을 보고 가슴을 치며 슬퍼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의 죄를 슬퍼하라.”고 장차 닥칠 재난에 대해 예고하신다. 교회 안에서 이들 예루살렘 부인들은 항상 기도와 노력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도울 것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는 군중들. 그들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호산나로 그리스도를 환영하던 같은 군중들이 아니었던가? 군중이란 자기가 하는 행동의 의미도 잘 모르고 거름지고 시장까지 따라가는 몽매한 자들이다. 그래서 독재가들은 바로 이런 우매한 군중심리를 충동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고 다수결이라는 마법의 칼날을 휘두른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바로 이 군중들의 눈먼 이성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처형하려고 배후 조정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뒤에 뉘우치며 땅을 치고 통곡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때리고 못박은 로마 병사들. 군인은 이성과 인륜과는 거리가 멀다. 상관의 지시에 짐승같이 맹종할 뿐, 눈물도 피도 없다. 그러나 그 중 그리스도의 늑방에 창을 꽂은 론지노는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회개할 것이요, 100인대장도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어 “이분이야말로 참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드러나지 않게 배후 조종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 그들의 운명은 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의 무서운 재난을 불러올 장본인들로 사탄의 괴수로부터 지옥의 훈장을 타게 될 1등 공신들이다. 그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니만도 못한 불행한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옆에 달린 좌도와 우도. 하나는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조롱하며 구원을 옆에 두고도 몰라본 불행의 장본인인 왼편 강도이다. 또 우도는 겸손히 그리스도를 알아 보고 구원을 애원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오늘 너는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리라.” 하는 천상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와 함께 입성하게 될 최초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 복된 사람이 되었다. 지금 우리도 그리스도의 주변에 서 있다. 오늘 이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 중에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온갖 피조물은 이 창조주 앞에 침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태양도 낯을 들 수 없어 빛을 잃고 땅도 놀라 지축이 흔들리고 구름도 이럴 수가 있느냐며 서로 부딪쳐 번개기 친다. 온갖 피조물은, 이 창조주요 구세주 잎에 죄송하고 송구하여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들고 있는 이 빨마가지를 1년 동안 십자가 고상 위에 걸어 놓고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던 그 마음이 변치 않도록 매일 바라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고 가끔씩 외치자. 주님만찬미사(성목요일) 인류구원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이 성삼일에 진행된다. 일년중 가장 거룩하고 뜻깊은 기간이다. 오늘 주님의 만찬미사에서 주님께서 거행하는 두 가지 행위 즉 세족례와 성체성사 거행의 심오한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세족례는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요, 봉사하러 오신 주님의 봉사정신의 곡진한 표현이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주셨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설명한다. 그 사랑의 표현이 세족례로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예절용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친히 닦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종이 주인에게 하는 동작과 같다. 이 세상 어느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 주었던가? 어느 종교의 신이 자기 신도들의 발을 씻어주고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죽어주었던가?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오늘 세족례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이것이 곧 이어지는 최후의 만찬에서 더 곡진하게 표현될 것이다. 12제자의 으뜸인 베드로는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며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아직 이 뜻을 모르는 베드로는 “안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라고 사양한다. 언젠가 주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실 때에도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고 펄쩍 뛰던 베드로의 모습이 재현된다. 베드로의 이 태도는 다만 스승께 대한 열렬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에 주님은 더 큰 사랑으로 응하신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이 뜻은 스승과 제자의 완전한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니, “너 만일 이를 거부하면 스승과의 일치를 깨뜨리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며 “주님, 그러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한다. 스승과 온몸으로 일치되고픈 베드로의 우직한 사랑의 충동에서 우러난 말이다. 제자의 마음을 헤아린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3년동안이나 스승과 일심동체가 되어 생활해온 제자들이 은총으로 온몸을 목욕한듯 깨끗해졌으니 다만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즉 세상을 딛고 수시로 세속으로부터 오염되기 쉬운 발, 곧 행동의 씻김이 필요한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고 겉옷을 입고 다시 식탁에 돌아와 앉으신 다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의미를 깨우쳐주시고자 하신다. “스승이요 주인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실천을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봉사자의 신분을 상징하는 옷차림인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는 적극적인 봉사자세로 대야에 물을 떠서 남의 발의 먼지와 때의 더러움을 씻어주심으로써 용서와 덮어줌의 아량을 베풀고, 더 나아가 수건으로 닦아주는 동작을 통해 개과천선에 이르기까지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사랑의 정신을 제자들에게 심어주신 것이다. 오늘 만찬미사의 두 번째 단계인 만찬예식은 그리스도 생애의 절정으러써, 성체성사를 세우심은 7성사의 정점인 것이다. 혹 어떤 철학자는 위의 세족례에서 예수님의 7가지 동작을 7성사의 예표로 보기도 한다. 만찬을 통한 성체성사야말로 그 정점이다. 구약의 과월절에는 흠없는 일 년된 숫양의 피를 받아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면 주님의 에집트의 맏자식을 치는 재앙이 비켜 지나가리라 했다. 그런데 오늘 만찬석상에서는 어린 양이신 천주성자의 피,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의 죄를 넉넉히 씻고도 남을 효험이 있는 그 성혈을 우리에게 음료로 주신다. 재앙이 비켜가는 정도가 아니라 사탄이 구 만리로 도망칠 것이요, 하느님의 축복인 영생의 신묘한 약이 되는 것이다. 구약의 과월절에는 누룩 없는 빵을 먹도록 하였지만 오늘은 빵의 형상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살을 우리 음식으로 주시니, 구약의 빵은 먹고도 배고팠고 죽어갔지만, 신약의 성체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불사약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신묘한 영생불사의 음식과 음료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는 점에 우리는 옷깃을 여며야 한다. 어느 신이 자기 신도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며 죽어갔는가? 어느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음식과 음료로 내어주며 죽어갔는가? 이로써 예수님의 우리게 대한 사랑이 그 얼마나 큰 것인지 드러나지 않는가? 그러기에 이 사랑을 깨달은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알고 나서는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다”고 하며 목숨을 바쳤고 부모보다도 나라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과 부모사랑 나라사랑이 엇갈릴 때는 서슴없이 하느님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바쳐주시고 당신 살과 피를 우리 음식과 음료로 제공해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당신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신 만찬미사에 참여하고 잇다. 또한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이 흐르도록 인류구원을 위해 애절한 기도를 바치신 것을 기념하여 교회는 성시간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증명해주신 예수성심을 공경하며 이 시간이후 수난감실에 옮겨지실 예수성체를 경배하며 우리의 사랑을 봉헌하자. 성금요일십자가 경배예절 크리스찬 신앙의 상징이요 우리 신앙인의 최대 유일의 스승인 십자가를 늘 가슴에 새기고 살고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이 십자가에 대해 감회가 새로워지고 그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십자가를 만드는 나무는, 먼 옛날 우리 선조 아담을 유혹하는 열매를 맺은 보속으로 나무는 형틀이 되어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 달려 죽는 십자가 형틀이 되었다. 죄인을 매어다는 십자가를 형성하는 나무는 때로는 넉두리 푸념도 했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저주 받을 죄인을 매다는 십자가 형틀이 되었는가 하고. 그러나 오늘 골고타 언덕에 우뚝 서있는 십자가나무는 사정이 다르다.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 귀한 나무로다. 아무 숲도 이런 잎과 이런 꽃을 못 내리라. 귀한 나무 귀한 못들 귀한 짐이 달렸도다.” 이 나무는 원조 아담을 멸망으로 이끈 열매 대신에, 영원한 구원의 임금님을 열매로 달고 있다. 이 임금님 덕분에 십자나무는 귀한 나무 영광된 나무가 되었다. 영광의 임금님께서 적신으로 달려 3시간 신음하신 후 운명하시니, 하늘도 눈을 가리우고 태양도 빛을 잃고 땅도 놀라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분으로부터 지음 받은 들짐승과 산 짐승들도 숨 죽이고 고요 속에 몸을 떠는 시간이다. 하늘 임금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다구니같이 외쳐대던 군중들도 자신들이 저지른 엄청난 죄악에 두려워 떨고 적막 속으로 사라졌다. 온천지가 고요와 무서운 적막 속에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마치 선생님의 꾸중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떨고 있다. 귀한 임금님이 흘리신 고귀한 피가 십자가 나무에 흥건히 젖고, 병사가 찌른 창에 피와 물을 쏟아 창조주를 배반한 세상의 죄를 씻고 또 씻으셨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셨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다.” “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의 손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리라.” 주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 그 분의 늑방의 물은 우리 죄를 씻는 세례성사이고, 그분의 선혈은 우리 영혼의 영약인 성체성사의 상징이다. 그분의 늑방에서 교회가 탄생하여 자라고 십자가를 통해 그분의 백성을 모아 들이시듯, 교회는 세례로 새 백성을 모아 들이고 성체로서 영혼을 양육한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경배하며, 그 옛날 모진 백성이 찌른 무엄한 가시와 독설이 저지른 엄청난 과오를 오늘 우리의 죄악과 불경으로 되풀이하지 않도록 결심하는 뜻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신 하늘 임금님의 발에 입맞춤하자. 부활성야미사(루가 24,1-12)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것은 인류역사의 중심사건이다. 이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 위에 그리스도교는 기초를 두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믿음은 사도들의 목격증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뵈었고 부활하신 그 분의 말씀을 들었고 함께 음식을 나누기도 했으며, 토마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늑방에 직접 손을 넣어보기까지 한 목격증인인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마지막 순간에 도망쳤으나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을 듣고 다시 모였고 다시 모인 그들 앞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단순한 환시가 아니라 육신 부활의 뚜렷한 증거였으니, 사도들은 이렇게 체험한 사실을 피로써 용감히 증거하였던 것이다. 목격증인의 증언이야말로 가장 신빙성이 있고 권위 있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그 이후의 수많은 학자, 성인성녀들이 따를 수 없는 사도단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40일 동안 밤낮을 기리지 않고 도시와 시골에서 집안 혹은 바깥에서 때로는 호수 기슭에서 또 때로는 산 위에서 개인에게 또는 500명의 군중 앞에서 나타나셨다. 이로써 그 분의 부활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일 먼저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다음으로 제자들에 앞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 어머니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는 자리 곧 성체성사를 세우시는 자리에는 성모님이 계시지 않았는데 부활하신 주님은 어머니에게 먼저 나타나셨음도 주목해야 한다. 성체성사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인 주교 및 사제들에게 주시는 성사인데 반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는 은혜는 그 분께 대한 신덕과 사랑에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님 부활을 끝까지 의심 없이 믿으셨던 분은 오직 성모 마리아 한 분뿐이었으니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뵈올 수 있는 특권은 성모님께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 다음으로 주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죄녀로서 가장 주님의 죄사함의 은총을 많이 받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께 대한 은혜에 감사한 나머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채로 닦아드리며 사랑을 표현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까지 찾아와 울며 통곡하여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 목격증인들인 여인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그 여인들의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은, “주님의 두 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는 놓치지 않으려는 여인들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 “내형제들”은 물론 그리스도의 사도들이다. 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실까? 갈릴래아, 그곳은 고기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유서 깊은 곳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어부”로 다시 부르시는 것이다. 오늘 독서는 구약의 7독서를 통해 하느님의 거대한 구원경륜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고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의 복음이 결정적으로 구원사건의 절정에 우뚝 솟아 있고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간이 그리스도의 부활신학으로 종합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에집트 종살이에서 가나안 복지로 향한 행진은,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는 파스카 행진이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사건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 희망은 장차 우리의 썩을 육신도 그리스도처럼 불사불멸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보증을 제시한다. 부활을 체험한 여인들의 비법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발아래 동참했음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현장 도처에 드리워진 십자가의 수난의 현장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부활주일 낮미사(사도 10,34-43; 골로 3,1-4; 요한 20,1-9) 오늘은 주님의 부활주일이다. 부활은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큰 희망이요,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나 흔히는 부활이 있기까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잊기 쉽고 십자가의 수난을 외면한 채 부활의 기쁨만 맛보려 하기 쉽다. 성주간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에서 원조 아담과 화와의 배반으로 에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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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7-1-연중13주-화-마태8,23-27 Stephanus 201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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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6-21-연중11주간-토-마태6,24-34 Stephanus 201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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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6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6-18-연중11주간-수-마태6,1-18 Stephanus 201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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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 주일, (대)축일 강론 2014-6-15-삼위일체 대축일(출애34,4-9; 2고린13,11-13; 요한3,16-18) Stephanus 201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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