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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이 세상 재물을 어떻게 얻어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약은 청지기의 비유를 들어 가르쳐주신다. 그는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였지만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그 약은 청지기의 부정한 행위를 옳다고 칭찬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그의 약삭빠른 민첩성에 대해서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이고 청지기는 우리 모든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이지 종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약은 청지기가 세속의 온갖 거래에 있어서 그렇게 민첩했던 것처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영신적인 일에 더욱 민첩한 태도를 지녀야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희생을 바치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업가는 사업체를 성공시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한다. 사업 때문에 그는 가정과 가족들마저 소홀히 할 때도 종종 있다. 그는 오락과 여가를 잊고 지낸다. 그래서 그는 나이에 비해 일찍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신경성 위궤양 등 달갑지 않은 질병까지 얻기도 한다. 그는 성공하기를 바라는 일념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자수성가하여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만한데, 그만 과로로 쓰러지는 안타까운 경우를 이따금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모아놓은 재산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물론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다고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 재산이 자손들에게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안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는 그 재산 때문에 자손들끼리 불화를 일으킬 뿐 아니라 오히려 자손들이 나태해지고 돈 귀한 줄 모르고 향락에 젖어 탕진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녀들이 부모의 은공을 알 리도 없다. 이렇게 남겨놓은 많은 유산 때문에 오히려 자녀들이 불행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세상의 재물을 위해 그토록 분골쇄신 악착같이 모은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하느님을 제쳐놓고 오로지 물질 위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생활이겠는가. 이처럼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은 우리 신앙인의 삶과는 정반대의 생활인 것이다. 오래 전에 TV에서 "뿌리"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었다. 주인공은 아프리카 만딩고족의 용사의 아들인 쿤타킨테였다. 그가 어느 날 산에 갔다가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혀 미국으로 팔려가면서 전개되는 이야기였다. 쿤타킨테는 갖은 학대 속에서 심한 노동과 비참한 생활을 통해 말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게 되지만 나는 자유인이다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급기야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가락을 잘리기도 하였다. 어떤 흑인 노예들은 아프리카에서 미개한 생활을 하느니보다 노예일망정 미국의 문명생활이 낫다고 자포자기하였지만, 쿤타킨테는 인간에게는 먹는 것 입는 것보다 더 높고 위대한 자유의 이상이 있음을 항상 잊지 않았으며 하나밖에 없는 딸 퀴즈에게도 그 정신을 심어주었다. 퀴즈는 어느 날 또 다른 농장의 노예로 팔려간다. 그녀는 거기서 농장 주인에게 순결을 잃게 되지만 "네가 내 몸을 빼앗지만 내 마음까지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고 하며 아버지가 물려준 자유인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이 정신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몸은 노예일망정 마음까지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을 일상생활 속에서 늘 심어 주었다. "뿌리"라는 드라마가 주는 이러한 교훈처럼 인간은 아무리 비참한 생활을 하여도 마음은 노예로 묶이지 않고 소중한 자유에 대한 이상을 가져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노예적 삶이 존재하고 있다. 일의 노예가 있는가 하면 돈의 노예가 있고, 술의 노예가 있는가 하면 사치와 허영의 노예도 있다. 그리고 더 비참한 것은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한다. 물과 기름과 같은 것이라면 어차피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포기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상 재물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얻을 수 있는 덧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천상 재물은 영구불변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기지도 못한다."(마태6,2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하늘에다 재물을 쌓도록 노력할 것이며, 둘째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데 육신의 일보다 더 부지런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데모스테네스라는 유명한 연설가가 있었다. 그는 말을 더듬었고 음성 또한 가냘프기만 했다. 이 두 가지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설가가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말을 더듬는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입에 조약돌을 넣은 채 연습하였고, 바닷가로 나가 파도소리보다도 더 크게 소리를 내려고 있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몇 년 동안 지루하고 답답한 훈련기간 동안의 실로 피나는 노력을 거쳐, 그는 마침내 당대 최고의 연설가가 되었다. 세속의 명예를 위해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투 노력하는 것이 이와 같을진대, 그렇다면 하늘나라를 차지하려는 우리의 지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떠한 각오로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순교성월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앙자세에서 이를 역력히 볼 수 있다. 백삼위 성인 중의 맏형 격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하느님의 진리와 복된 소식을 이 땅에 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경주하셨는가. 1년 1개월의 짧은 사제생활 동안 그분이 이룩하신 업적은 진정 놀랍기만 하다. 한강변 새남터에서 흘린 그의 고귀한 피와 늠름한 기상은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확신하는 자세요 천국의 행복에 대한 확신에 찬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도 순교자들 앞에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매일 매일의 작은 순교의 기회인 시련과 고통을 잘 참아 나아가도록 하자. 이동축일 강론(한국 순교자 대축일) 인간은 누구나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지금 당장 가겠다는 사람은 100에 하나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위해,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을 초개와 같이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200년 전 한국 땅에 천주교가 알려지면서 100여 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이 바로 이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 무엇을 위해 내던지는 것은 그 무엇이 자기 생명보다 고귀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일제시대에 십자가를 땅바닥에 눕혀놓고 이것을 밟고 지나가기만 하면 목숨을 살려준다고 달래어도 그들은 고지식하게도 십자가를 밟지 못하고 잔인한 죽음을 감수했던 것이다. 생각 같으면,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그들의 말대로 하고, 신앙은 마음속으로만 해도 될 것 같은 약은 꾀도 생각나지만 그들은 감히 그리스도가 달리셨던 십자가를 경멸하는 행동을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요, 신심가였던, 파스칼도 "생명을 바치는 증인들의 역사를 나는 기꺼이 믿노라."고 하며 가톨릭의 순교역사를 찬양했다. 한국 순교사화를 보면 신자들이 공초 신문 받는 형장이 바로 전교지요, 신앙의 증거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기록에 의하면 지난 번 문초 때에 형리였던 사람이 다음 번 공초 때는 피고석에서 문초를 받는 일이 가끔 있었다고 한다. 천주학쟁이를 문초하다보면 사학죄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한결같이 천주님 때문에 원망 한 마디 없이 생명을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무식한 백성까지도 유창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설명하는 품이 문초를 하는 형리의 마음마저 온통 흔들어 놓았으며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순교자들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알게 되었고, 어느덧 신자로 돌변하여 자신들이 휘두르던 칼날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게 된 것이다. 신앙은 이토록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 그러기에 떼르뚤리아노 교부는, "순교자의 피는 신자들의 씨앗"(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이라고 한 바 있다. 또한 성서 말씀에도 있듯이,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고 하지 않았는가. 또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2고린 4,17)라고 하였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라고 하였다. 이는 순교자에게 약속된 죽음보다 강한 희망이다. 또한,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순교가 애덕(愛德)의 극치임을 말해준다. 즉 하느님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목숨을 송두리째 바치는 사랑의 절정이 순교로 표현되는 것이다. 순교자의 왕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낮추시어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립 2,8)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순종과 겸손이 엮어낸 옥구슬이다. 순교는 최상주권자인 하느님께 자기 영혼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는 최대 순종의 제사요, 겸손이요,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순교는 신·망·애덕과 용덕의 결정체요 모든 덕의 종합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동정의 정덕(貞德)도 순교 앞에서는 그 빛을 잃는다."고 하였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순교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순교자에게 모욕이 된다."고까지 하였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은 순교 자체로 천국 상급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 또한,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바오로 사도는 용감하게,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4-39) 하고 외친다. 오늘 응송에서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현세에서 눈물로 씨를 뿌리면 천국에서 하느님의 축복으로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세의 십자가 고통을 잘 참아 바치는 것은, 바로 천국 영복소(永福所)의 저금통장에 예금하는 것과 같다. 심판 날에 주님은 우리가 현세에서 주님을 위해 수고한 만큼 입금된 통장을 우리 앞에 내놓고 저울질하실 것이다. 그때에 가서 기쁨으로 충만하고 주님의 칭찬을 받는 비결을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 말씀에 따라 주님을 증거하다가 생명까지 바친 분들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한국 순교자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을 들면, 이곳 미리내에 묻혀 계시던 수선탁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순교자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승지벼슬을 지내셨음에도 신앙을 위해 그 벼슬을 내던졌던 남종삼 요한 성인, 수죠자 중 가장 어린 13세의 순교자 유대철 베드로 성인, 천재로서 16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임금으로부터 관직을 약속 받고도 신앙 때문에 순교의 길을 택해 육시(戮屍)를 당해야만 했고, 그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핏덩어리 갓난아기(景漢)은 추자도로 귀양 보내어지는 극형을 받은 황사영(黃嗣永)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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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5-15-부활4주간-목-(사도13,13-25; 요한13,16-20) Stephanus 2014.05.14
811 주일, (대)축일 강론 2014-5-14-성마티아 사도 축일-부활4주간-수(사도11,19-26; 요한10,22-30) Stephanus 2014.05.13
810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5-13-부활4주간-화-(사도11,19-26; 요한10,22-30) Stephanus 2014.05.13
809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5-12-부활4주간-월-(사도11,1-18; 요한10,11-18) Stephanus 2014.05.11
808 주일, (대)축일 강론 2014-5-11-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사도2,14-41;1베드2,20-25; 요한 10,1-10) Stephanus 2014.05.11
807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5-10-부활3주간-토-(요한6,60-69) Stephanus 2014.05.03
806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5-9-부활 3주 금-(사도9,1-20; 요한6,52-59) Stephanus 201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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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5-7-부활3주간-수(요한6,35-40) Stephanus 2014.05.03
803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5-6-부활3주간-화-(요한6,30-35) Stephanus 2014.05.03
802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5-5-부활3주간-월(사도6,8-15;요한6,22-29) Stephanus 201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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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9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5-2-부활2주간-금-(요한6,1-15) Stephanus 2014.05.01
798 주일, (대)축일 강론 214-5월 1일-노동자의 주보 성요셉 Stephanus 201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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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 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4-29-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학자기념-부활 2주간-화-(요한3,7-15) Stephanus 201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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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 주일, (대)축일 강론 2014-4-27-부활 제2주일-하느님 자비주일 Stephanus 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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