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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고린 5,17-21; 요한 19,25-27) 오늘은 사순절에 맞는 첫토요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사순절은 계절상으로도 신앙적의미와 잘 부합된다. 겨울이 끝나가는 시기이며, 봄이 시작되려는 길목에 봄이 움트는 시기요, 아직 겨울나무가지는 죽은 듯 앙상하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새순이 머리를 숨기고 이제 곧 움틀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시기요, 산천초목이 새봄맞이에 설레이며 새순을 틔우기에 부산한 절기이다. 인생의 절기로도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허물로 누벼놓은 지난 날을 돌아보며 하느님을 등졌고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던 과거는 곧 영신적으로 겨울철이요, 죽은듯 앙상한 가지처럼 혹한과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철이었지만 이제 죄에 죽고 새 생명의 부활의 밀씨를 싹틔우는 시기가 바로 이 사순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의 고린토2서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께 지은 죄로 인하여 하느님과 불목하게 된 것을 화해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내세워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죄를 모르는 그 분을 죄 있는 사람처럼 여기셨고 우리는 그레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낳아주신 어머니 마리아도 역시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의 어머니가 되신다. 사순절은 바로 이 화해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죽음심을 묵상하는 시기요 그 어머니 마리아의 통고를 묵상하는 시기이니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이 수난에 동참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순시기는 단순히 고통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승리인 부활을 준비한다는 목표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순시기는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로, 은총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단식하시며 사탄과의 영신전쟁을 치르셨듯이, 우리도 삼구(三仇: 세속, 마귀, 육신)와의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금욕, 재계, 보속의 생활과 무엇보다도 기도에 많은 정성을 기울여야 할 시기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다. 인생에 시련을 당할 때일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신비가 더욱 깊이 마음에 사무치고 위안을 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숙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복음서 속에 생동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응시하시면서 주시는 대답이 “너는 이세상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나는 이세상에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죽으러 왔다”는 강한 메시지이다. 죽음은 그 분의 목표였고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목적도 바로 우리 인류를 대신해서 죽으러 오신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그 분의 말씀은 당신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 주셨다. 우리 삶 속에 사순시기가 없이는 부활시기도 없을 것이다. 십자가는 부활의 조건이요, 가시관은 찬란한 빛을 준비하는 서막인 것이다. 결국 인생에는 두 가지 철학이 있을 뿐이다. 첫째 철학은 우선 먹고 마시며 축제를 즐기다가 끝나는 삶이요, 두번째 철학은 먼저 단식을 하고 고행을 하다가 나중에 잔치의 기쁨을 맛보는 삶의 철학이다. 희생을 통해 나중에 얻게 된 기쁨이야말로 언제나 비할 데 없이 감미롭고 더 없이 오래 남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환희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로 시작한다. 정신적 희열로 시작하는 환희의 종교들은 흔히 환멸과 실망으로 끝난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십자가를 제외시켜버린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교도 없어져 버릴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무대에 있어서 우리의 대역(代役)을 해주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죄인인양 우리의 죄를 대신 떠맡으시어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갚아야 할 죽음이라는 빚을 갚아주셨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죄’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죄를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다. 죄불감증이 현대인들의 특징이라 한다면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경고한 바와같이 죄를 부정하면 용서를 받을 길이 막힌다는 사실이다.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세번이나 유혹하던 사탄은 “다음 기회를 노리며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 그 다음 기회란 오늘날 우리들의 신자생활을 의미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중에 잠시라도 방심하는 중에 사탄은 그 옛날 광야에서 패배한 것을 설욕하고자 우리의 헛점을 노리고 있으며 주님께 빼앗긴 우리 영혼을 자기들의 손아귀에 다시 넣고자 안깐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그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신전쟁이요, 삼구전쟁이다. 우리 앞에는 개인적인 십자가도 있고 가정적인 십자가도 있고 사회적, 국가적인 십자가도 놓여 있다. 가정 안에는 미운 사람, 애물단지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이들을 다름아닌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천사요, 보물단지로 생각하자. 하느님은 그들로 인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성화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공로 쌓을 기회를 주시고자 하신다. 사회적 십자가는 지금 경제적인 십자가가 가장 크다. 그러나 부정적인 요소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의 긍정적인 모습을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연전에 우리는 IMF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민족의 허영심과 사치풍조, 과소비의 거품을 제거하는 특효약이 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유익한 십자가가 될 수 있다. 국가적인 십자가로서는 남북분단의 민족적 십자가이다. 민족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로 회두하고 민족의 통일은 오로지 하느님의 기적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민족이 이를 기화로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 하느님을 공경하게 된다면 남북분단의 십자가는 민족적인 회두의 축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십자가는 보배다. 십자가를 사랑하자. 십자가의 신비는 예수성심 사랑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과 인류, 인류상호간의 화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십자가의 세로대는 하느님과 인류의 수직적인 관계에서의 불목을 화해하는 의미를 담고 있고 가로대는 인간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에서의 불목을 화해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마리아와 우리를 대표해서 요한사도가 서 계신다. 성모님은 우리 현실의 십자가의 현자에서 늘 위로와 격려를 주시고 계신다. 마치 당신 아드님의 골고타 십자가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수난에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셨듯이. 오늘 화해의 어머니인 마리아께 죄로 인해 하느님과 불목한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도록 청하고 이웃과의 불목도 한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일치와 화목을 위해 전달해주시도록 간구하자. 우리는 어머니의만또 아래 모일 때 비로소일치가 가능하고 화목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화해의 어머니께 우리의 도움이 되시도록 긴구하며 어머니와 함께 파스카를 향한 승리의 행군을 시작하자. (in English) This time is lent that is the time of grace which we expect the Easter of the triumph. Humankind objected against God with sins. But God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in Christ, not counting men’s sins against them. And he has committed to us the message of reconciliation. Be reconciled to God. God made him who had no sin to be sin for us,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Christ is the messenger of reconciliation and holy Mary is the mother of reconciliation. According the Gospel, <> We can be forgiven from God through Jesus Christ. We might ask holy Mother to intercede to his Son for the forgiveness of our sins. There are many crosses before us, that are individual cross, and familial cross, social cross, national cross etc. Cross is the present of grace of God. Because cross is the key to open the door of paradise. We ought to love the cross in order to gain the triumph of Easter. Let us run the paschal road for the purpose of eternal life with the mother of reconciliation. 고통의신비 1단: 예수님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 (first mystery of dolor: Jesus prays on the mountain Olive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받으셔야 할 고통을 샅샅이 보셨다. 받아야 할 고통을 미리 보고 아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싸여 피땀을 흘리시며 이 고통을 멀리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그러나 모든 일이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이시기를 잊지 않으셨다. 이때야말로 인간 예수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고통을 앞에 두고 우리와 똑같이 괴로워 하시고 두려워 하시며 피땀까지 흘리셨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없앨 수도, 피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고통을 예수님처럼 괴로워할 수 있고, 두려워할 수 있고, 또한 고통을 멀리해 주십사 하고 간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역시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그분이 허락하시는 고통을 감수할 결심을 해야 한다. 하느님이 고통을 멀리해주신다면 사랑의 표시로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고통을 주신다면 그것도 역시 사랑의 표시로 감사히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이 고통은 나 자신의 보속과 타인의 구원을 위한 보속으로 인내하며 기쁘게 받아들인다면 공로가 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가? 적어도 보속과 희생으로 인내로이 받아들이는가? 또한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은 수난의 원인인 전 인류의 죄를 보셨다. 인류가 역사 안에서 범했고 또 범하게 될 모든 죄는 예수님의 어깨에 깊이 박혀 그를 밀어 무너뜨릴 듯했다. 예수님은 그때 내 죄도 보셨다. 내가 범한 죄와 범하려는 죄를 다 보셨다. 그때 나의 죄가 피땀을 흘리실 정도로 예수님을 괴롭고 두렵게 하여 그분을 밀어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는가? 죄를 범하게 되는 유혹이 닥칠 때마다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시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계심을 연상하자. Then Jesus came with them to a small estate called Gethsemane and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My soul is sorrowful to the point of death. Wait here and keep awake with me.” And prayed his Father again “if it is possible, let this cup pass me by. Nevertheless, let it be as you, not I, would have it.” He came back to the disciples and said to them, “You can sleep on now and take your rest. Now the hour has come when the Son of Man is to be betrayed into the hands of sinners. Get up! Let us go! My betrayer is already close at hand.” Every Thursday night, we pray the holy hour for the compensation for the lost time of three disciples, according to the request of Jesus our Lord. 제2단: 예수님께서 매맞으심 (second mystery of dolor: Jesus is flagellated) 예수님은 나의 죄로 인하여 매를 맞으신 것이다. 나는 죄를 범함으로써 예수님께 채찍질을 가한다. 내가 죄를 범할 때마다 그 무서운 납덩이가 달린 채찍을 손에 들고 예수님을 때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예수님을 내 손으로 때렸던가? 나의 죄악과 악의로 인하여 예수님을 얼마나 괴롭히고 슬프게 해드렸던가? 나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고통, 특히 다른 사람이 나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때려 괴롭히는 일, 이것이 바로 내가 받아야 할 채찍질인 것이요, 나와 남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사랑으로 받아야 할 채찍질인 것이다. 생활에서 받는 여러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채찍질은 나에게 필요하고 이익이 된다. 만약 아무 고통이 없이 순조롭게만 이루어 진다면 나는 점차 오만해지고 경솔해지며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그 반면에 가끔 실수와 곤란을 겪고, 남의 오해, 모욕, 무시 등을 받아야 삶이 겸손하고 신중하게 행동하게 되고 하느님께 신뢰하게 되는 법이다. 여러 모양의 채찍질을 받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채찍질을 받으신 예수님께 가까워지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오히려 은총으로 생각하며 감사하자. The men who had arrested Jesus led him off Caiphas the high priest, where the scribes and the elders were assembled. Then they spat in his face and hit him with their fists; But “he was pierced through for our faults, crushed for our sins. On him lies a punishment that brings us peace, and through his wounds we are healed.”(ISAIAH 53,5) 제3단: 예수님께서 가시과 쓰심 (third mystery of dolor: Jesus is crowned with spine) 예수님의 머리 속에 그 날카로운 가시들이 박혀 들어갔을 때 그분이 느끼셨던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시가 두개골에 닿는 순간의 극심한 아픔! 예수님은 참으로 끔찍한 아픔을 아무 말없이 그대로 받으셨다. 머리는 육체의 정수이며 모든 감각, 감정, 지성, 의지의 활동을 관장한다. 그만큼 머리의 통증은 육체와 정신의 구석구석까지 흩어져 그분을 완전히 고통의 덩어리로 변하게 항 것이다. 나는 육체적 아픔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 우리의 죄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 진다. 예수님은 조롱하는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또한 조롱당하는 사람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려고 병사들의 조롱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신경과 감수성을 지니신 인간으로서 모든 모욕을 우리와 똑같이 느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순결하고 고귀한 인간으로서 우리보다 훨씬 예민하고 아프게 느끼셨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육체적 아픔보다 조롱당하여 느끼는 정신적 아픔이 더 심할 것이다. 내가 조롱 받을 때 나는 조롱 받으시는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다. The soldiers led him to the inner part of the palace, that is, the Praetorium, and dressed him up in purple, twisted some thorns into a crown and put it on him. And they began saluting him, “hail, king of the Jew!” They struck his head with a reed and spat on him; and they went down on their knees to do him homage. Harshly dealt with, he bore it humbly, he never opened his mouth, like a lamb that is led to the slaughter-house, like a sheep that is dumb. he was pierced through for our faults, crushed for our sins. 제4단: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 (forth mystery of dolor: Jesus brings cross to the Calvary.)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동산을 오르시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인생 길을 걷는 모습과 같다. 인생은 고통의 십자가길이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8; 16,24)고 하셨다. 고통의 십자가를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넘어지고 예수님과 함께 일어나 예수님과 함께 다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어려움 앞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실수를 저지른 후에도 좌절하지 말며, 항상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 분발해 나가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자체를 슬퍼하기 보다는 그 수난의 원인인 나의 죄를 먼저 뉘우쳐야 할 것이다. 우리도 베로니카와 같이 예수님얼굴의 피땀을 닦아드릴 수 있는 선행과 기도의 수건을 예수님께 드려 예수님을 위로해드리고 기쁘게 해드리자. Jesus carried cross to Calvary. Large numbers of people and women followed him and mourned and lamented for him. But Jesus turned to them and said, “daughters of Jerusalem, do not weep rather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 Anyone who prefers father or mother to me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prefers son or daughter to me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in my footsteps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finds his life will lose it; anyone who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Mt 10,38) 제5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심 (fifth mystery of dolor: Jesus was crucified and died)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신 순간의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요,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내주신 자기증여의 극치였다. 남김없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절정에 달한다. 죽음은 또한 인간의 모든 악의 결과이며 종합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악 때문에 십자가형을 받으셨으나, 그분은 오히려 죽음을 가장 순수한 사랑의 표시로 바꾸시고, 완전한 자기 봉헌과 희생, 전면적 겸손과 순명의 표적으로 변화시키셨다. 실제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질투하여 그분을 죽였으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 죽음을 그들에 대한 사랑과 용서로 받아들이셨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극도의 교만과 죄악에 빠져 예수님을 죽였으나, 예수님은 도리어 그 죽음을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명과 겸손으로 변화시켜 바치셨다. 예수님의 죽음이야말로 악을 선으로 이기고 죄를 사랑으로 갚는 행위의 극치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의 힘을 눌러버림으로써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새 생명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와 화목하고 아버지께 도달하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이야말로 참하느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계시한 것이며 또한 참인간의 사랑을 최고도로 보여준 것이다. They crucified Jesus. One of the criminals hanging there abused him But the other said,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In deed, I promise you,” he replied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By his sufferings shall my servant justify many, taking their faults on himself.” (ISAIAH 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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