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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회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신심행위를 거행하고 있는 날들 가운데 빠스카 축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날은 없다. 왜냐하면 빠스카 축일이야말로 다른 모든 축제일을 거룩하게 하는 원천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지체들 즉 모든 사제들 수도자들, 모든 신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온전히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신을 기초로 하는 하느님의 성전은 구석구석 돌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답고 밝게 빛나야만 하기 때문이다.(성 대레오교황)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랑을 총체적으로 표현하시게 될 빠스카의 은총에 합당하게 참여하는 데 필요한 정화와 준비의 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계절상으로도 신앙적의미와 잘 부합된다. 겨울이 끝나가는 시기이며, 봄이 시작되려는 길목에 봄이 움트는 시기요, 아직 겨울나무가지는 죽은 듯 앙상하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새순이 머리를 숨기고 이제 곧 움틀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시기요, 산천초목이 새봄맞이에 설레이며 새순을 틔우기에 부산한 절기이다. 인생의 절기로도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허물로 누벼놓은 지난 날을 돌아보며 하느님을 등졌고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던 과거는 곧 영신적으로 겨울철이요, 죽은듯 앙상한 가지처럼 혹한과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철이었지만 이제 죄에 죽고 새 생명의 부활의 밀씨를 싹틔우는 시기가 바로 이 사순시기인 것이다. 모센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의 희망없는 혹독한 종살이에서 하느님의 선물로 주실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해 40년의 기나긴 광야의 행군을 떠났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생명의 법을 받기 위해 40주야를 단식하며 기다렸고 엘리아 에언자는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적을 피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40일의 고독한 행군을 하였다. 때가 차자 그리스도께서는 3년간의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위한 준비로 30년의 나자렛의 숨은 생활로도 부족하여 마지막 40일간의 단식재계로서 광야에서의 사탄과의 3차에 걸친 전투를 치르셨다. 과연 이토록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 영생의 파스카는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토록 사탄과의 처절한 전투를 치르셨다함은 우리에게도 영생의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용맹정진 하라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그 준비를 마치 모세가 주님의 말씀을 바윗돌에 새겼듯이 우리도 주님을 말씀을 우리 마음에 지워지지 않도록 굳세게 아로 새겨야 한다. 이토록 우리 신앙생활이 쉽지 않기에 고교 교부들은 이름하여 영신전쟁이라 불렀던 것이다. 영신전쟁이니 전쟁에는 적이 있게 마련인데 세상의 전쟁에는 적이 하나뿐이지만 우리 영신전쟁에는 적이 셋이나 되니 얼마나 치열한 전쟁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원수는 육신과 세속과 마귀이다. 재의 수요일에 읽은 복음(마태 6,1-18)에서 예수님은 이들 세가지 원수들을 대적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가르쳐 주셨다. 첫째 육신원수를 처이기는 방법으로는 단식의 무기를 들라고 하신다. 세속전쟁을 치르는 병사는 많은 음식으로 힘을 키워야 하겠지만 영신전쟁을 치르는 우리는 오히려 단식으로 육욕을 없애고 영신적으로 민첩해져야만 육신원수를 쳐 이길 수 있다. 육신을 원수라 표현한 것은 영혼이 주인이 되어 육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육신을 학대하라는 뜻이 아니다. 육신의 역할은 ‘영혼의 집’으로서의 역할이지 육신은 영혼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족하지 사치한 치장이나 육신쾌락의 노예가 된다면 영혼생명이 위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세속이라는 원수를 이기기 위해서는 자선을 행하라고 하신다. 세속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을 끊으려면 참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 곧 자선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으로 세속원수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세속은 우리를 물욕과 쾌락과 권세욕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자 끌어 당긴다. 우리는 이 절제없는 애착심을 끊어버리기 위해 가장 질서있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수직적 사랑으로 수평관계에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 곧 자선을 베푸는 것이 세속이라는 원수를 대적하는 길이다. 마귀라는 원수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신다.마귀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육신을 가진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통해서만 마귀를 쳐 이길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이다. 그런데 삼구를 그 근원을 따져 본다면 마귀의 조종아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낙원에서 원죄를 범하도록 유혹한 것이 뱀으로 상징되는 마귀였고 원죄로 말미암아 사욕편정이 일어나 육신이 영혼을 거스리고 세속이 탐욕으로 유혹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귀는 낙원에서 패배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갈바리아 산 골고타까지 끌고가 처형하고자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 하수인으로 동원된 무리들은 다양하였다. 성경을 가장 잘 안다고 자처하였던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 세속권세의 으뜸 상징인 로마 총독 빌라도, 총칼의 위력의 상징인 로마병사들, 다수의 힘이면 만능이라고 주장하는 군중의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소리, 힘센 장수라도 이것으로 묶으면 꼼짝 못한다고 뽐내는 밧줄도 무례하게 하느님의 아드님의 손을 묶는데 한 몫을 담당했고, 원죄이후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의 저주로 엉겅퀴와 가시가 다발지워져 예수님의 머리와 이마를 찌르는데 함ㄴ 몫을 했고 원조가 범죄함ㄴ 후 저주받은 선악과의 나무는 그리스도의 성시를 매달아 운명하게 했고, 아무리 단단해도 나를 당해낼 자 없다고 뽐내던 강철은 쇠못이 되어 주님의 손과 발을 무참히 꿰뚫었다. 사탄은 눈에 안 보였으나 배후에서 두목처럼 이들 하수들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살해하도록 조종하였다. 이들 온갖 피조물들은 그들이 협력하여 살해한 분이 창조주이심을 모른채 어리석게도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인생극의 악역을 담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 저주의 십자가를 구원의 문으로 축성하셨다. 오, 십자가의 신비여! 준주성범에는 “성십자가의 왕도”(12장)에서 “많은 사람들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16,24) 하시는 말씀을 모진 말씀인줄 생각한다. 그러나 최후의 십판때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25,41)하시는 이 마지막 말씀을 듣기가 한층 더 모진 것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씀의 뜻은 “나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지 않고 거부한다면 결국 최후의 십ㅈ판대전에서 지옥의 영원한 불속에 들어가라는 최종판결을 받을 것이니 이것이 훨씬 가혹한 판결이요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준주성범은 계속해서 그러니 “너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 십자가 지기를 왜 두려워하느냐? 십자가에는 구원이 잇고 십자가에는 생명이 있고 십자가에는 원수의 공격을 막는 병기가 있다.십자가에는 천상의 아름다운 맛이 흐르고 십자가에는 마음의 용기가 있고 십자가에는 영신의 즐거움이 있으며, 십자가에는 덕의 극치가 있고 십자가에는 성화의 원만함이 있다. 십자가가 아니면 영혼도 구학지 못하고 영생도 얻을 희망이 없다. 그러니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라. 그러면 영생의 길을 갈 것이다.”라고 권면한다. 삼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존재가 마귀라고 했다. 삼구전쟁에 이기기 위한 무기를 단식과 자선과 기도라 했는데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십자가다. 마귀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처형함으로써 영원히 승리한 줄 알았으나 3일만에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 마귀의 권세를 처이기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저주의 상징이 축복과 은총의 상징이 되엇다. 오늘 복음과 독서는 참된 단식의 의미를 되새겨주며 마음의 절제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며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고 장차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올 것이며 그때가 되면 당신 제자들도 단식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단식은 절제의 표현이요, 정신적 절제, 역경 중에 참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하고 싶은 일도 절제하며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기 싫은 일도 기꺼이 해야하는 정신적 절제가 곧 영혼의 탐식을 절제하는 단식의 참 뜻이라하겠다. 우리 모두 40일간의 영신전쟁을 시작하며 단식과 자선과 기도의 무기를 들고 십자가 깃발을 치켜들고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사탄의 머리를 밟고 계신 평화의 군단장 성모 마리아와 함께 파스카를 향한 숭리의 행군을 시작하자. 사순시기는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로, 은총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단식하시며 사탄과의 영신전쟁을 치르셨듯이, 우리도 삼구(三仇: 세속, 마귀, 육신)와의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금욕, 재계, 보속의 생활과 무엇보다도 기도에 많은 정성을 기울여야 할 시기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다. 인생에 시련을 당할 때일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신비가 더욱 깊이 마음에 사무치고 위안을 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숙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복음서 속에 생동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응시하시면서 주시는 대답이 “너는 이세상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나는 이세상에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죽으러 왔다”는 강한 메시지이다. 죽음은 그 분의 목표였고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목적도 바로 우리 인류를 대신해서 죽으러 오신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그 분의 말씀은 당신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 주셨다. 우리 삶 속에 사순시기가 없이는 부활시기도 없을 것이다. 십자가는 부활의 조건이요, 가시관은 찬란한 빛을 준비하는 서막인 것이다. 결국 인생에는 두 가지 철학이 있을 뿐이다. 첫째 철학은 우선 먹고 마시며 축제를 즐기다가 끝나는 삶이요, 두번째 철학은 먼저 단식을 하고 고행을 하다가 나중에 잔치의 기쁨을 맛보는 삶의 철학이다. 희생을 통해 나중에 얻게 된 기쁨이야말로 언제나 비할 데 없이 감미롭고 더 없이 오래 남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환희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로 시작한다. 정신적 희열로 시작하는 환희의 종교들은 흔히 환멸과 실망으로 끝난다.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은 참 생명의 관문으로서 너무도 중대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포기하고자 하는 세 가지 대시도가 있었다. 그리스도가 공생활을 시작할 때에 악마는 세상을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지름길을 제시하였다. 사도집단의 으뜸인 베드로도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단념하도록 권하다가 “사탄”이라는 혼된 책망을 맞았다. 끝으로 골고타에서 십자가 밑에 서있던 그리스도의 적들이 도전적인 유혹과 공격을 가한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믿겠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십자가를 제외시켜버린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교도 없어져 버릴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관련돠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무대에 있어서 우리의 대역(代役)을 해주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죄인인양 우리의 죄를 대신 떠맡으시어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갚아야 할 죽음이라는 빚을 갚아주셨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죄’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죄를 인정하려하지도 않는다. 죄불감증이 현대인들의 특징이라 한다면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경고한 바와같이 죄를 부정하면 용서를 받을 길이 막힌다는 사실이다. 현대세계의 전체적인 상황은 그리스도와 시자가를 떼어 놓으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잇다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오른 편에 세워두고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를 왼편에 세워 두고 보아라.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순시기 없는 부활시기를 원하는 현대 서구의 퇴폐적인 향락문화를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이미 극기와 희생과 금욕도 사라졌다.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를 선택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우상을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고 십자가를 강요하던 무신론 공산주의가 한 때 하느님 없는 물질만능의 지상천국을 건설하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공산주의가 시작된 지 70년이 지난 1987년에 소련의 해체로 인해 그들의 생각이 허황된 것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들은 빈곤에 허덕이게 되어 그들의 허구성이 밝혀지게 되었다. 세상종말에 선과 악의 세력이 치열한 싸움을 벌일 때 사탄은 위대한 박애자요 사회개혁가로서 십자가 없이 나타나서 인류를 마지막으로 유혹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애 첫 순간부터 그의 삶 전체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스도의 구유 위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며, 그의 세례는 단순히 세례성사의 모범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사야가 53장에서 예언한 희생물이 되라는 소명이기도 하였다. 당신의 삶을 표현한 진복팔단을 실천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리라는 십자가의 씨가 감추인채 이미 싹이 트고 있었고 십자나무에 이미 새순이 돋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으셨으나, 죄에서 세상을 구하실 때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가 필요하였다.이번 사순시기가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은혜롭고도 감미로운 친교를 나누는 시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모든 시련과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을 받기 위한 그릇임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주님은 비유말씀을 통해,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우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포도철이 되자 그는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쳐죽이고 하였다. 인내심 많은 주인은 또다시 종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역시 이들도 죽여버렸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 보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다.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저자를 죽이고 포도원을 가로채자”고 하면서 주인의 아들도 처형하였다.>> 는 내용이 소개된다. 복음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와 인류의 무자비함과 배은망덕이 잘 대조되고 있다. 하느님은 일찍이 예언자들을 파견하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도록 여러 차례 설득하고 달래도 보고 갖은 방법으로 참아주셨지만 구약의 예언자 중 제명대로 살다간 예언자가 별로 없었고 예언자들의 말을 고분 고분 들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마지막 때가 되자, 하느님은 당신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면서, “그래도 내 아들만은 알아주겠지!”하고 보내주셨건만, 인류는 이분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대역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뽑혀 하느님의 포도밭을 가꾸어 추수할 특권, 즉 소작인의 특권을 받았으나 주인과 같아지려고 아들의 상속권을 넘보다가 그 아들 마져 살해하니 하느님은 ,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을 물색한 나머지 이방인들 손에 포도원을 넘겨주시어 오늘날 우리들까지도 하느님의 포도원의 일꾼으로 불림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즉 우리는 하느님 포도밭의 소작인이 된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소작인으로 불린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가톨릭 신자라는 기득권을 자랑삼고 구원을 따놓은 당상이라고 자부하며 권리 위에 낮잠이나 잔다면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의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2,000년전 당신의 선민이요, 동족인 유다인들에 의해 배척당하고 십자가형에 넘겨졌다. 오늘날 우리가 죄에서 돌아서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틀에 매달도록 넘겨주는 것이 될 것이다. 사순절,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세번이나 유혹하던 사탄은 “다음 기회를 노리며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 그 다음 기회란 오늘날 우리들의 신자생활을 의미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중에 잠시라도 방심하는 중에 사탄은 그 옛날 광야에서 패배한 것을 설욕하고자 우리의 헛점을 노리고 있으며 주님께 빼앗긴 우리 영혼을 자기들의 손아귀에 다시 넣고자 안깐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그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신전쟁이요, 삼구전쟁이다. 마귀는 낙원에서 패배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갈바리아산 골고타까지 끌고가 처형하고자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였다. 여기에 그 하수인으로 불린 무리들은 다양하였다. 성경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파 사림들과 율법학자들, 세속권세의 으뜸 상징이던 로마제국의 빌라도 총독, 총칼의 쥔 무력의 상징인 로마병사들, 다수의 힘이면 만능이라고 믿고 생각없이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고 외쳐대는 군중들, 밧줄도 한 몫을 했고, 쇠못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고정시키는데 큰 몫을 했고, 원조가 첫 범죄를 범했던 선악과 나무도 그리스도의 성시를 매달아 운명하게 하는 불편한 임종자리가 되었다. 이렇듯 하느님의 피조물이 합세하여 창조주를 거슬러 십자가에 처형하는데 모두 한 몫을 담당하였다. 사탄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즉 온갖 피조물이 사탄의 하수가 되어 창조주를 십자가에 처형하는데 한 몫을 거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류역사에서 악역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놀랍게도 그 저주의 십자가를 구원의 문, 영생의 문으로 축성하셨다. 오, 놀라운 십자가의 신비여! 준주성범의 “성십자가의 왕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시는 말씀을 모진 말씀인줄 생각하지만 그러나 최후의 심판 때,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마태 25,41) 하시는 이 마지막 말씀이 더 모진 말씀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러니 너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 십자가 지기를 왜 두려워하느냐? 십자가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는 생명이 있고, 십자가에는 원수의 공격을 막는 병기가 있다. 십자가에는 천상의 아름다운 맛이 흐르고, 십자가에는 영생이 있다. 십자가가 아니면 영혼도 구하지 못하고 영생도 얻을 희망이 없다.” 고 하였다. 이 십자가는 우리 삶의 전후좌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십자가는 피하려해도 피할 수 없다. 내 십자가가 크다고 바꿔 보려해도 헛수고다. 내 십자가를 버리면 어느덧 더 큰 십자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십자가 지는 법을 배우자. 그리스도께서는 “내 멍에는 달고 내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십자가를 가볍게 지는 비결은 그리스를 더 크게 사랑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무게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반비례한다” 고 한 말이 있다. 우리 앞에는 가정적인 십자가도 있고 사회적, 국가적인 십자가도 놓여 있다. 가정 안에는 미운 사람, 애물단지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이들을 다름아닌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천사요, 보물단지로 생각하자. 하느님은 그들로 인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성화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공로 쌓을 기회를 주시고자 하신다. 사회적 십자가는 지금 경제적인 십자가가 가장 크다. 그러나 부정적인 요소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의 긍정적인 모습을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연전에 우리는IMF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민족의 허영심과 사치풍조, 과소비의 거품을 제거하는 특효약이 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유익한 십자가가 될 수 있다. 국가적인 십자가로서는 남북분단의 민족적 십자가이다. 민족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로 회두하고 민족의 통일은 오로지 하느님의 기적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민족이 이를 기화로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 하느님을 공경하게 된다면 남북분단의 십자가는 민족적인 회두의 축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십자가는 보배다. 십자가를 사랑하자. 십자가의 신비는 예수성심 사랑 안에 감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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