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축일 강론
2015.12.25 21:22

12월 26일-성 스테파노 축일미사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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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성 스테파노 축일미사강론

 

 

어제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성탄 신비를 경축하였다. 연말이 되면 한해동안 10대 빅뉴스를 발표한다. 예수성탄사건은 인류역사를 통해 가장 큰 뉴스거리일 수 밖에 없다. 임금이 종이 되는 것도 대단한 일 일텐데 창조주가 피조물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건은 전대미문의 역사적 빅뉴스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예수성탄일을 기점으로 역사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분의 탄생 전(BC)과 탄생 후(AD)로 구분한다.

창조주 하느님이 피조물인 사람이 되신 신비야말로 신비 중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은 높아지려고 경쟁하는데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의 모습으로까지 낮추시고, 하늘의 영광을 사양하시고 푸대접받고 오해와 멸시천대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끝내 은혜를 입은 자들의 배은망덕으로 십자가의 모진 죽음까지 당하시면서도 그들에게 섭섭타, 억울하다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끝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며 숨지셨다.

구유 앞에 머물며 하느님의 겸손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자.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은 우주도 담을 수 없이 큰 분이요, 나약한 아기의 모습 속에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이 숨겨져 있으며,

고사리 같은 아기의 손에는 천지를 한 말씀으로 창조하신 장인의 솜씨가 숨겨져 있고,

곱디고운 아기 입술에는 영생과 영벌의 준엄한 진단으로 때로는 꿀같이 달고 때로는 소태같이 쓴 명의의 약처방을 내리시는 영생불사의 신묘한 영약이 감추어 계신다.

아기 예수님의 초롱초롱한 눈에서는 먹보다도 검은 죄도 봄눈처럼 녹일 수 있는 자비심이 스며 나온다.

에덴의 정원을 밟던 곱디고운 사랑스런 아기 예수님의 발은 온천하에 평화를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이다.

++++++++++++++++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이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 감동되어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을 위해 바친 분이다. 스테파노라는 말은 월계관이라는 뜻이다. 아기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목숨 바친 스테파노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신 것이다.

신앙은 우리의 생명의 뿌리를 찾게 해 주고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해답을 준다. 어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늘 첫 순교자 스테파노처럼 인간을 하늘에 불러올리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하시며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하고 예언하신다. 이 예언을 증명한 첫 증거자가 오늘 기념하는 성 스테파노이다.

그의 죽음은 그리스도와 닮은 꼴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엔 서로 닮는다고 한다. 성 스테파노는 그리스도의 유언을 자신의 유언으로 택하였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이 유언은 후에 순교의 후배들에게서도 길이 메아리친다. 우리의 수선탁덕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도 휘광이들의 칼날 앞에서 역시 같은 유언으로 기도하였다.

성 스테파노의 순교현장에는 박해자들의 옷을 받아들고 있던 사울도 서 있었다.(사도7장) 그는 이일에 찬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테파노의 용서의 기도소리를 듣고 그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율법지상주의사고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사도행전 9장의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을 듣고 눈이 안보이던 그는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으며 율법의 비늘이 벗겨지고 율법보다 강한 사랑의 실체 예수님의 현존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눈이 열렸던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2고린3,16에서 “주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너울은 치워집니다.”고 하며 율법의 너울을 벗어버리라고 권면한다. 이와같이 사울의 개종에 스테파노의 용서의 기도가 한 몫을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박해자들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하고 걱정하지 말라. 아버지의 성령께서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고 하셨다. 또 “너희가 나 때문에 미움을 받더라도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고 격려해주신다.

하느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또한 당신나라로 부르시기 위함이다. 용맹스럽게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영광 중에 하늘에 오르신 성 스테파노를 기념하며 우리도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의 신앙을 본받아 천국에 입장권을 예약합시다.

어제는 하느님이 세상에 내려오심을 경축하는 날이었고, 오늘은 사람이 하늘에 올라감을 축하하는 날이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아기로 탄생하셨지만 오늘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은 인류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서 탄생하신 것이다. 오늘 스테파노는 천상에서 태어나기 위해 죽은 것이다. 예수님은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스테파노는 세상에서 죽고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했다. 예수님과 스테파노의 공통점은 둘 다 한번은 죽고 영생으로 부활하였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순교자의 왕이요 스테파노는 그 뒤를 따른 순교자로 신자로서는 최초의 순교자이다. 순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육신적인 순교에 앞서 정신치명 곧 의지의 치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수님도 성부의 명에 순명하시어 세상에 오셨고, 생애동안 오로지 아버지 뜻만을 찾았다. 골고타에서 육신치명당기 전에 겟세마니에서 정신치명을 먼저 당하셨고 요세파 성녀에게 주신 말씀 중에 골고타의 육신치명 보다 겟세마니에서 정신치명 당할 때 더 괴로웠다고 하셨다.

천국에 이르는 비결은 예수님이 타고 내려오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된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며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셨다.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편한 길이 있다면 주님은 아마도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의 길만이 아버지께 이르는 사다리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버리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는 것(Imitatio Christi)외에 다른 왕도가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리스도만큼만 살아가도록 힘쓰자.

예수님은 당신 생애동안 오로지 아버지 뜻만을 찾았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나의 음식”이라고 하셨다.

스테파노는 스승인 예수님을 본받고자 마지막 그분의 유언을 자신의 유언으로 택하였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지우지 마시옵소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사울은 그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받아들고 있었고 그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사도8,1)

그때 스테파노의 용서의 기도를 들으며 사울의 심장에 연민의 파도가 치기 시작하였다.

사울(큰자)은 다마스커스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두기 위해 달려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나서 그리스도인으로 뒤집어져 바오로(작은자)가 된 후 그에게는 스테파노의 순교에 대해 박해자의 공범이라는 마음 빚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차 전도여행 때 리스트라에서 박해자들에게 돌에 맞아 실신하여 죽을 뻔하였다가 살아난 후 다시 리스트라 도시로 들어가면서 바오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스테파노를 돌로 칠 때 공범자로서의 마음 빚을 이제야 갚았다는 마음으로 육신은 죽을 고통을 겪었어도 마음은 홀가분하였으리라. 자기를 죽이려한 리스트라 도시를 아무 원한 없이 들어가 전교한 바오로의 원수사랑의 마음은 스테파노에게서 전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리라.

루스페의 훌젠시우스주교는 스테파노의 사랑과 용서가 사울을 원수로서 잃어버리지 않고 죄책감의 수치심 없이 천국에서 다정한 친구가 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칭송한다.

수도자의 공동생활에는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과 형제애가 의견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하느님 안에서 일치점을 찾을 때 주님 사랑 안에서 일치점을 찾게 된다.

창설자 신부님의 교훈처럼 나와 너의 일치는 타협이 아니라 삼각의 정점 즉 하느님의 뜻에서 일치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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