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6.01.07 16:47

2016-1-8-주님 공현 후 금(1요한5,5-13; 루카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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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후 금(1요한5,5-13; 루카5,12-16)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가 등장하는데 나병은 천역으로 죄인으로 취급하였다. 바리사이적 관점에서 죄인은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을 멸시하였다. 반면에 예수님은 죄인을 단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죄스러운 행실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듯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그들과 어울리는 행동을 하셨다.

오늘복음에서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선생님은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낫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하고 자비를 청하였다.

나병환자의 첫 증세는 불감증이다. 다미안 신부가 나환자촌에 들어가 환우들을 돌보다가 어느날 저녁 발씻기 위해 뜨거운 물을 받고 물에 발을 담갔으나 감각이 없었다. 나병에 전염된 것이었다. 이와같이 감각이 없는 것이 나병의 첫째 증세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영신적으로 하느님을 민감하게 느낄 수 없거나 죄의 불감증이나 가볍게 여기는 경향성은 곧 영신적 나병환자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도우심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에게 얹으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며 치유해주시듯 우리의 부족함을 치유하시고 완전케 하실 것이다. 주님이 손을 얹는 동작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셨던 그 손길이요, 재창조의 권능이 실려있는 손길이요, 장차 심판하실 손길인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방법 중에는 환자가 먼저 주님의 몸에 손을 대는 경우(5,27의 하혈병 환자의 경우)도 있지만 나환자의 경우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있고 가까이 근접도 하지 못하도록 격리 수용되는 처지인지라 예수님께 다만 외칠 뿐 감히 만질 수가 없는 것이다.

에순ㅁ은 말씀 한 마디로도 능히 치유하실 수 잇는 분이요, 원격조정으로 리모콘 치료도 가능한 분이다. 백인대장의 종의 치유기적사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데 오른 복음에서 누구도 만지기를 꺼려하는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이 유난히 직접 손을 대시며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군중들로부터 저주받은 가엾은 영혼에게 주님이 다가가시어 손수 손을 얹어 먼저 소외된 호나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신다. 사실 그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은 군중들로부터당하는 멸시천대 소외감이엇을 것이다.

이 무언의 예수님의 행동은, 나병은 다만 질병일 뿐이지 그가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혹 죄로 인한 질병일지라도 창조주이신 당신의 자비와 용서로 치유할 수 있음을 드러내시는 것이며, 통회하는 영혼에게 주님은 언제라도 용서와 자비가 넘친다는 것을 깨우쳐주시며 회개하는 영혼의 희망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새해의 생활준칙:

1)-. 죄는 기필코 피해야한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나약성으로 인해 죄를 범했다 해도 즉시 통회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2)-. 하느님 자비가 내 죄보다 크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대 데레사 성녀의 말씀, “우리 죄가 아무리 커도 주님의 자비에 비하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롯불에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인간의 죄가 하느님 자비의 불을 결코 끌 수 없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것이 요즘 하느님 자비가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자비의 희년 전대사도 교회를 통해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자비는 당사자의 통회하는 마음 위에 내리는 은전이다. 죄 속에서 변화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하느님 자비가 임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 자비가 약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동성연애를 합법화해달라고 데모하는 사람들에게는 통회의 의지가 없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깊은 통회와 개과천선의 의지가 없이 자비를 기대할 수 없으며 교회는 이 점을 분명히 가르칠 필요가 있다. 낙태죄나, 동성연애자를 교회가 관심을 기울이고 연민의 정으로 사목적배려를 행하여야함은 타당하나 그 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통회하도록 충분히 교훈하여 회개에로 인도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BC. 8세기 요나예언서를 예로 들어보자.

하느님은 요나예언자를 니느웨로 파견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국인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기가 두려웠고, 그들이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타르시스로 가려다가 바다 큰 물고기 뱃속에 3주야를 갇혀 고생하다가 마지못해 니느웨로 가서 “40일후이면 니느웨는 망한다”고 성의 없이 예언을 했지만, 니느웨 백성들은 임금으로부터 하인에 이르기까지 베옷을 걸치고 잿더미위에서 단식하며 통회하였다.

임금은 칙령을 내려, “사람이든 심지어 짐승들까지 단식하며 하느님께 부르짖어라. 저마다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한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어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하달하였다.

그러자 하느님이 마음을 돌이키시어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회개의 힘이다.

하느님이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셨다. 그러자 요나가 화가 나서 하느님께 심술을 부린다.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어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어 벌하시다가도 쉬이 뉘우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진작에 알았습니다. 그러니 속상해 죽겠으니 제발 제 목숨을 거두어주소서”

그러자 하느님이 요나에게,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이도성에는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12만 명이나 있고, 수많은 짐승이 있는데 이 커다란 성읍 니느웨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니느웨를 멸망을 면하고 용서를 받았다. 짐승들도 베옷을 입고 단식하였다고 짐승까지 기억해주시는 자상하신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남유다의 히즈키야왕때 아시리아의 최번성기에 산헤립이 18만 5천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처들어와 하느님을 모독하고 온갖 모욕적인 말로 유다인들을 조롱하고 예루살렘성전을 모독하는 말로 위협을 가하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하자 하루밤사이에 아시리아 군대 내에 자중지란이 일어나도록 하여 하느님이 조종하시어 몰살당하고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에 따라 그들이 활 한 번 쏴보지 못하고 돌아갔고, 산헤립은 돌아가자 마자 우상 산당에서 예배하다가 아들에게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하느님께는 민족간의 차별도 편애함도 없으시다. 다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말씀대로 착하게 살아가며 나약성으로 인해 죄에 넘어질 때 즉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영혼에게는 용서와 자비로 구원해주시지만, 오만방자하고 교만에 빠져 자기 뜻대로 사는 영혼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아합왕과 같이 악한 왕도 엘리야를 통한 징벌의 경고를 받고 옷을 찢고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하며 회개하자 하느님은 용서하셨다(1열왕21,29).

 

혹 우리가 감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죄스러운 어떤 것이 있다해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다만 주님의 자비가 이 세상 어떤 죄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확신하고 주님 앞에 용감하게 나아가 엎드려 용서와 자비를 청한다면 주님은 화를 내셨다가도 쉽게 뉘우치는 분으로서 우리의 겸손한 태도 앞에 언제나 마음이 약해지신다.

“네 죄가 진홍색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해주고 네 죄가 다홍색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희게 하리라.”(이사1,18)고 하며 다가오신다.

 

 

오늘 주님은 1독서 요한 1서 5장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분을 증언하는 것이 셋이 있으니, 성령과 물과 피라고 한다.

물과 피의 인성을 취하신 그분의 몸이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성령께서 이분이 성자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다. 그분을 받아드리면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명확한 진리인 것이다.

마귀의 거짓유혹에 속아 죽음이 오게 된 세상을 살면서 영생을 그리워하는 우리에게 영생의 길이 열렸고 그것은 하느님이 보내신 성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명백한 진리에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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