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성체성사의 의미와 성체의 삶

 

1. 성체성사의 중요성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전체의 원천이요 정점(교회헌장 11)이며, 교회생명의 원천(일치교령 15)이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원천과 중심”(사제직무 6)이며, “선교활동 전체의 원천과 정점”(사제직무5)이요,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으며”(사제직무 5) “성체에 의해서 교회는 계속해 살고 증대되며”(교회 26)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체성사 거행에 그 원천과 중심을 두지 않으면 결코 건설할 수 없다.”(사제직무 6)고 교회문헌들은 명시하고 있다.

이같이 성체성사는 가톨릭교회의 원천이요 중심이요 정점이며, 마치 나무의 뿌리와 꽃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우리 신앙생활의 원천이요 중심이요 정점이 되어야 하며, 우리 신앙생활의 힘이 성체성사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성체를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하고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므로써 우리 신앙생활의 극치가 이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는 방법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할 때나 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나 성사를 집행할 때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도 성체 안의 현존이 가장 실재적이고 본체적이며 완전한 현존이라고 할 수 있다.

칠성사 중 다른 여섯 가지 성사는 신자들로 하여금 활동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하는 의식이라면 성체성사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하여 성 토마스는 성체는 실제로 그리스도 자신을 내포하고 있으며영성생활의 완성이요, 모든 성사의 목적과도 같다고 했다.

 

2.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의 의미에 대한 교회사적 정의

역사적으로 볼 때 11세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는 현존-제사-식사의 차원으로 의미가 강조되어 왔다.

11세기에서 16세기까지가 개신교 주장들에 대항하여 성체성사의 현존성을 확립하는 시기였다면, 트리엔트 공의회로부터 20세기까지는 미사성제의 의미가 중시되어 발전된 시기였으며,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하여 일치와 나눔의 의미가 성체신비의 표면에 부상하게 되었고, 성체가 쪼개지고 나누어지듯 우리의 삶도 이웃을 위해 쪼개지고 나누어지는 삶을 살도록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사제가 미사 때 빵과 술을 축성하면 빵과 술의 형상은 그대로 있지만 더 이상 단순한 빵과 술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신앙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참으로 오묘한 신비이다.

믿기 어려웠던 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겠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요한6,52)하고 수군거렸으며, 제자들마저 그만 예수님을 떠나 더 이상 동행하지 않았다.(요한6,66)

상황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성체신비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없다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릴 따름이다.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라는 용어를 쓰면서 성체성사 제정의 말씀이 사제를 통하여 울릴 때, 실체(Substantia)인 빵과 포도주의 본질적인 존재는 변하고, 우유(accidentia)인 외적으로 나타나는 형상(forma: 물리학적 구조들, , , 무게, 크기, )은 그대로 남는다고 함에 대하여,

이는 Aristoteles철학에서 유래하는 진부한 개념이라고 하여 목적변화 (transfinalisatio).의미변화(transsignificatio),기능변화 (transfunctionalisatio) 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를 더 잘 설명하려고도 하지만 의미변화나 목적변화, 그 어느 것도 실체변화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실체변화는 목적변화와 의미변화 모두를 내포하지만 목적변화나 의미변화만으로 실체변화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례헌장 47항은 성체신비의 다양한 국면들을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시대를 초월하여 십자가상 희생제사를 영속화시킨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먹히시는 하나의 빠스카 잔치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이며, 사랑의 성사이며, 일치의 표지이며, 애덕의 끈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첫째, 인류의 죄를 기워 갚고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요, 인류를 위한 속죄제사라는 것이다.

둘째로, 기원 전 13세기에 유대인들이 에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음을 기념하던 빠스카 잔치와 같이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참다운 빠스카 잔치요,

셋째로, 예수님께서 이 잔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1고린11,25;루카22,20)이라고 했듯이 구약에 숫 송아지를 잡아 피를 뿌리며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계약을 맺었듯이(탈출24,4-8), 예수님께서 짐승의 파가 아닌 자신의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었으니, 성찬을 거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성혈로 맺으신 새로운 계약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새 백성임을 자각해야 하며,

넷째로, 친교와 나눔의 식사이다.

최후의 만찬은 빵의 나눔(사도2,42), 주님의 만찬(1고린11,20), 주님의 식탁(1고린10,21) 등으로 불림과 같이 주님의 몸과 피를 음식으로 드는 특별한 성찬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공동식사는 일치, 사랑, 나눔, 화목 등의 보편적인 표시이며 방법이다.

성찬이 지니는 나눔의 의미는 그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부각되었다.

종합하면, “어제의 예수님(삶과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는 기념제요 오늘의 그리스도(부활과 현존)를 기리는 찬양제이며 내일의 주님(재림)을 기다리는 희망제이다. 성찬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우리 님을 모시고 님 따라 살기로 다 함께 다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한마당 축제인 것이다.

 

3. 성체성사의 의미확장

성체의 신비는 천주성자 강생의 신비의 연장이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 베들레헴 외양간에서만 강생하려하지 않으시고 세상마칠 때까지 온 세상 방방곡곡 만민의 가슴 속에 강생하시길 원하신다. 그 방법이 성체성사인 것이다.

빵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또한 사랑 자체인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아 십자가의 죽음 때만이 아니고 순간순간 세상 마칠 때까지 세상 곳곳에서 성부께 자신을 봉헌하고 싶어 하신다.

그 방법도 역시 미사성제를 통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방법이며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최고 걸작품이다.

성자께서 강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구원이다. 인간구원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바, 이는 소극적 구원과 적극적 구원이다. 소극적 구원은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건져내는 데 비유한다면, 적극적 구원은 건져낸 사람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여 훌륭히 교육시켜 아들로 삼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소극적 구원은 인간해방, 즉 죽음과 죄악의 사슬에서의 해방이다.

이에 반해 적극적 구원은 하느님과의 일치요 인간신화(人間神化)이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시켜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며(Divinisatio), 그리스도화(Christoficatio)하는 것이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하느님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 마음에 오심도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을 위함이며 강생의 신비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구원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니 성체성사야말로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는 영생의 빵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요한6,54)고 하셨다.

아무도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으며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영웅호걸도 왕후장상도 이 소원을 이루기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간절한 소원을 성체성사 안에서 채워주셨다. 그리하여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고린15,55)고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시고 또한 영생의 빵을 주신 것이다.

둘째로, 성체는 죄악에서 해방시켜 준다.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1베드5,8) 있는데, 인간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연약하기에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마태26,4) 죄를 이기고 신앙에 항구하고 주의 계명을 지켜 나가려면 하느님의 도우심과 특별한 보약이 필요하다. 달나라에 가는 인공위성에 특별한 연료가 필요하듯이 천국으로 가는 인간에게도 특수연료가 필요하다. 그러한 보약이나 연료로써 성체를 주신 것이다. 원래 보약이란 병을 고치기도 하지만 몸을 튼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성체도 이같이 인간이 오욕의 불을 끄고 칠죄 중에서 벗어나게하는 치료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굳세고 튼튼하고 용감하게 하는 보약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셋째로, 인간신화를 위한 유효한 수단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을 닮는다는 것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처럼 어려운 일이다. 이를 위해 하느님이 인간으로 강생하셨듯이 그러기 위해 빵이 되시기까지 하셨다.

인간이 하느님을 닮으려면, 즉 그리스도처럼 되려면 특수한 음식이 필요한데, 그 음식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다.

성체도 음식인 이상 먹힌다는 점에서 다른 보통 음식과 마찬가지지만, 보통음식이 먹는 자의 피와 살이 된다면 성체는 오히려 먹히는 자의 피와 살, 즉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신화, 인간의 그리스도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외 아드님은 우리가 당신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사람이 되심으로서 우리가 신이 되도록 우리 인성을 취하셨다.”고 했듯이 이러한 인간신화를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으로서의 육화가 필요했고, 더 구체적으로 빵의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강생하심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성체성사는 인간혁신의 수단이다. 즉 성체성사는 인간이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 입도록 하고”(골로3,9),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마태5,48)하는 새 인간창조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마음으로 새 사람이 되라.”(로마12,2; 골로3,9; 에페4,24)고 역설하며, “창조주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시며”(로마11,36; 에페2,10)라 하고 새로운 인간은 무엇보다도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남보다 앞서서 서로 존경하고”(로마12,9)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며”(로마12,15)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요한15,13)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새로운 인간을 위한 인간, 종말인간(1고린15,45), 규범인간, 본연의 인간, 미래의 인간이란 말로 표시하기도 하지만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를 닮은 인간, 즉 사랑의 인간이다.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먹어야하고 사랑이 되기 위해 사랑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로, 성체성사는 사회혁신의 도구이다. 인간을 혁신하는 이유는 인간의 집단인 이 사회를 혁신함에 있다. 교회헌장에 이 백성의 으뜸은 그리스도 자신이요, 이 백성의 율법은 사랑의 계명이요, 이백성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 성취이다.”(교회9)라고 하며 교회의 존재이유를 하느님 나라건설에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하느님나라가 임하게 되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재정립되고(에페1,10)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고 즉 만물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찬 상태를 만드는 데 있다.

전 인류가 하느님의 한 백성을 구성한 그리스도의 한 몸에 성령으로 한 성전을 건설하게 하기 위함이다.”(교회17)

 

4. 성체를 영하기 위한 준비

성체가 강생의 신비의 연장이라면 성체를 영할 때마다 우리는 성자잉태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처럼 정결함과 순명하는 마음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문전박대당하며 춥고 누추한 외양간에 오셨던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다시 오시는데 인류가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해서야 될 것인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한다.

만군의 왕이시오 생사대권을 가지신 분이 오시는데 어찌 가만히 있으랴! 영성체는 하늘과 땅의 결합이요 빛과 어둠의 결합이요, 생명과 죽음의 결합이요, 가치와 허무의 결합이요, 임금과 종의 결합처럼 지극히 높은 자와 비천한 자의 결합이니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이겠는가!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2,23)하고 아담이 하와를 만나 부르짖던 감격적 순간의 재현일 수 있다. 어느 글라라회 수녀는 빈털털이 방랑자가 부자를 만난 기쁨이요, 앓는 사람이 의사를 만난 기쁨이요,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본 반가움이요, 목마른 자가 옹달샘을 만난 감격이라고 영성체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영성체를 통하여 천주성자가 성모께 잉태되었듯이 우리 마음 속에서도 강생의 신비가 재현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마니피캇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은혜가 내리지만 우리가 합당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보배는 비오듯 쏟아지나 받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다.”라는 말처럼 성사를 통한 하느님 은혜가 비록 바닷물처럼 많다 해도 우리의 받을 그릇이 작으면 그 이상 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한 홉 짜리는 한 홉, 한 되짜리는 한 되, 한 말짜리는 한말 이상 더 받을 수 없다. 갈바리아 산에서의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똑같이 구원의 순간을 지켜보았지만 우도는 믿음을 발하여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되고 좌도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마음의 자세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체를 습관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며 또 자주 영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잘 준비하여 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을 살펴보고 빵을 먹고 잔을 마셔야 한다.”(1고린11,20) 또 육신의 준비로는 한 시간 공복재를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 있다.

 

5. 성체를 영한 자의 의무-성체의 삶

성체를 영한 자는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한다. 성체(Eucharistia)란 말은 어원상 감사한다는 뜻이다. 감사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주여, 주여 부른다고 모두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마태7,21),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잘라 버린다(루카13,7)고 했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야고2,17)라고 했다. 열매를 맺으려면 두 가지 의무를 완성해야 한다. 첫째는 개인적 의무요, 둘째는 사회적 의무이다.

성체는 우리를 변혁시키러 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사랑의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가 되고, 사랑을 먹고 사랑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성체를 영하고도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하지 못한다면 비료를 주어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주님의 저주를 받기에 알맞다.

성찬례 중의 놀라운 변화란 우리가 그리스도화 되는 데 있는 것이다. 보통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듯이 보통 사람인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음식을 먹으면 내가 자라지만 성체를 영하면 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는 점점 작아지고 그리스도가 점점 커지시는 것이다.(요한3,30)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갈라2,20)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 안에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그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실까? 다시 인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제헌되기를 원하실 것이고 당신의 살과 피를 사람들에게 음식으로 내어주길 원하실 것이다, 즉 형제들의 밥이 되고자 하실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영성체하는 자들의 사회적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 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카12,49)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을 놓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피와 살로 우리를 양육함은 이 세상에 불을 지르기 위한 볼쏘시개로 쓰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불쏘시개가 불붙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기를기도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온 세상이 재건되고 그리스도 안에 모든 인류가 하나 되어(에페1,10) 사랑만이 만물을 완전히 지배할(1고린15,28)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새 하늘과 새 땅”(묵시21,1-40을 건설하길 원하신다.

최후만찬 때 예수님께서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 하여라”(루카22,19; 1고린11,24)하심은 빵을 축성하고 나누어 먹는 예식만 행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최후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음과 같이 그러한 봉사의 생활을 하며, 예수께서 우리 죄를 보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도 부족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셨음 같이 우리도 그렇게 희생하고 형제들에게 살과 피를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이 하나의 미사가 되고 사랑의 나라 건설을 위한 자기 변모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사회에 사랑이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으라. 그러면 사랑이 싹트리라.”는 말처럼 크리스찬 생활이란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는 씨앗으로 살아가야 한다.

꽃이 없다고 한탄한다고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꽃씨를 심어야 하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12,24-25)

내가 사랑의 밀씨가 되어 떨어져 죽으면 백배의 사랑의 밀씨가 생기고, 그 백배나 되는 사랑의 밀씨가 또 떨어져 죽는다면 만 배의 사랑의 밀씨가 생길 것이고,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라면 나의 희생이 보잘 것 없다고 주저할 수만 없을 것이다.

 

6. 성체성사의 신비로 민족중흥의 새 역사 창조

개인으로는 우수하나 단결하지 못하며 분열되기 쉬운 취약점을 지닌 우리 민족이 하나로 화합하고 일치할 수 있는 길은 성체의 신비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마태22,37-38)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정신 뿐이다. 우리는 한 몸이며 네가 죽으면 내가 죽고 네가 살 때 내가 산다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정신이다.(1고린12,12-31)

진정한 애국 애민 정신은 형제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는 성체의 신비 안에서 살 때 가능하다. 우리 순교자들도 위주치명자(爲主致命者)라고 하지만 육당 최남선 선생은 그뿐만 아니라 위국치명자(爲國致命者)라고 한다. 왜냐하면 가톨릭 종교야말로 이 나라 이민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다.”는 신념으로 죽었기 때문이라 하며, 자신도 개종 선언문에서 가톨릭 정신이야말로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할 수 있기에 애국적 차원에서 개종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선조들인 이벽, 다산 형제,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이가환 등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이 땅에 찬주교를 영입한 것은 단순한 종교적 차원에서만이 아니고 이 종교야말로 이 나라 이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애국적 차원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사랑의 성사요, 일치의 성사인 그리스도의 성체를 방방곡곡에 전하고 삼팔선을 넘어 북한 땅에도 성체를 모시고 갈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해야하겠다.

성체의 신비로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길인 한편, 참 애국운동이요 구국운동인 것이다.

 

7. 맺음말

성체는 크리스찬 생활의 뿌리요 꽃이며 성체성사는 강생의 신비의 연장이고 인류구원을 위한 구체적 수단이다. 인류구원은 죽음과 죄악을 이기는 보약으로, 인간을 죽음과 죄악에서 해방시키며 새 인간을 만들어 인간신화(人間神化)를 이룩하고 인간사회를 혁신하는 성사이다, 따라서 이 성사를 합당하게 영하여야 하며 나아가 성체를 영하는 자는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사명을 지닌다. 성체를 닮아 사랑이 되어 이 세상에 사랑의 나라를 건설할 사랑의 씨앗이 되어야할 것이다, 성체를 통하여, 성체 안에서, 성체와 더불어, 새사람이 되어 성체의 신비로 자신을 구원하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여야 할 것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공지 새로 가입하신 분들은 가입인사를 올려주세요(댓글로) ^^* 16 관리자 2012.09.17 51912 1
336 첫서원!!!- 2014-2-21 Stephanus 2014.02.24 1870 0
335 십자가 묵상 Stephanus 2014.02.20 2009 0
334 회심과 의탁의 기도 Stephanus 2014.02.20 2496 0
333 2014-2-6-성시간 강론 Stephanus 2014.02.06 2548 0
332 낙법의 명수 다윗의 신앙 Stephanus 2014.02.02 2649 0
331 말레이시아 선교 소식지(2013여름호) file 관리자 2014.01.25 2022 0
330 말레이시아 선교 소식지(창간호) file 관리자 2014.01.25 1888 0
329 평화신문 기사 (말레이시아 선교 최상기 레오 신부님 ) 관리자 2014.01.25 2417 0
328 참된 행복은? - 주님 세례축일 강론에서- Stephanus 2014.01.16 2709 0
327 관상부 태동-신광분원에 2013년 12월 15일(일) 1 Stephanus 2013.12.18 2608 0
326 2014 동계 성소자 수도원 체험 프로그램 안내 굴리엘모 2013.12.15 2258 0
» <<성체성사의 의미와 성체의 삶>> - 고 배문한 신부님의 글 요약 Stephanus 2013.11.18 4051 0
324 최 아벨 수사님 모친 선종-최정자 마리아(88세)-기도부탁합니다! Stephanus 2013.11.05 2794 0
323 이 에제키엘 신부님, 유스티노 신부님의 조모 이 점순 루시아 선종(대구 3회원) Stephanus 2013.10.10 3160 0
322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Who is Jesus Christ? Stephanus 2013.09.27 2635 0
321 다시 성시간을 재개하며... 골롬바노 2013.09.25 2809 0
320 겟세마니 동산 성시간 시작! Stephanus 2013.09.21 3037 0
319 수원교구와 미리내 수도단체들 간의 합의서에 대한 공동 성명 Stephanus 2013.09.18 5469 0
318 겟세마니동산복원 공사중 1 Stephanus 2013.09.12 2318 0
317 8월 중 수도원 일정 Stephanus 2013.08.12 2703 0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23 Next
/ 2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