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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신명 8,2-3.14-16; 1코린 10,16-17; 요한 6,51-58)

 

1. 만나. 예수님은 생명의 빵에 관한 담화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선조들에게 주셨던 만나의 기적을 언급하신다. 그러나 이 기적적인 음식은(바위에서 샘솟은 물과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제1독서가 말해주듯이 백성들이 오로지 사막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그러니까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이런 음식을 얻을 희망이 없을 때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음식과 물을 주시기 이전에 “너희를 낮추시고(너의 한계를 드러내고) 너희를 시험하시기를(네가 오로지 하느님만을 신뢰하는지) 원하셨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만나로 백성을 먹이신 의도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얻은 이 물질적 음식은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인간의 요구에 대한 하느님 편에서의 응답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로지 사막에서만, 곧 인간이 하느님 밖에서는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는 “메마른 땅”에서만 하늘에서 내려온 빵과 하느님의 말씀은 동일한 것이 된다.

 

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빵이 하나가 되는 이 신비는 오늘 복음에서 일치 그 자체로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더 큰 기적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이 일치는 몽매한 제자들에게는 비록 빵의 기적을 경험하였다고는 하지만 알아듣기 힘든 신비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이 말씀과 같을 수 있단 말인가? 한술 더 떠서 그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얘긴가? 게다가 예수님은 이 음식을 권고하는 차원이 아니라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오로지 예수님을 음식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먹기를 즐길 때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 안에 갖게 되고, 따라서 하느님 자신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생명의 빵은 구약의 선조들이 먹은 만나와의 평행선이 끊기게 된다. 왜냐하면 만나를 먹은 선조들은 이미 “죽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은 오로지 예수님이 주시는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알아듣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떠나간 반면에, 베드로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남는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사막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막다른 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즉 눈 딱 감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하게 만드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 기적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음의 정언적 선언만을 하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안에 생명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마다 다음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사막에서 마치 굶어 죽어가는 사람처럼 하느님의 품에 자신을 던져버렸다는 사실을.

 

3.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의미도 모른 채 진리로 받아들였던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몸이 많은 이들을 위한 하나의 빵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한 몸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같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나누기 때문에 유대감이나 결속력이 더욱 강화된다는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것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물리적 한 몸이 성체성사의 형태로 변화하여 우리를 이어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단지 그 사실만을 전할 뿐 어떤 구구한 설명이 덧붙지 않는다. 이것은 마술이나 마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는 신적 사랑의 어리석음, 인간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을 이루어 내시는 바로 그 사랑의 어리석음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시라는 그 이유 때문에 이 믿을 수 없는 일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역자 김관희 마르첼리노 신부 S.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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