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축일 강론
2022.04.24 06:47

2022년 4월 24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 자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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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을 가족같이! 신자들 가정에 평화!


오늘 복음은 토마스의 불신앙과 관련된 대목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신앙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토마스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봤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만 억울한 일이지요. 


요한은 이미 부활 사화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곧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 신앙은 부활 발현에 무조건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받던 제자는 단지 빈 무덤만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직접적인 확인을 요구합니다. 그는 '믿는다는 것'을 물질적인 차원에서의 '보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보는 것과 달리 물리적인 시각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감각이나 예리한 지성의 도움이 필요 없는 내면 깊은 곳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에 의탁하는 사람만이 감각적인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의 요청은 그리스도가 약속대로 여드레 뒤에 나타나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예수님께 가장 완전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은 여태까지 자기 자신만의 경험과 체험에 의존하며 살아왔던 토마스의 한계가 무너지는 소리이고, 그 한계를 넘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입니다. 이 신앙 고백은 초대 교회 전례에서 사용하던 신앙 고백 형태의 재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토마스의 신앙이 아무리 훌륭했다 하더라도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 안에 포함된 행복은 결코 얻어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살아온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나서라기 보다는 ‘예수님의 모습’때문일 것입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그의 고통의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그들 앞에 선 것입니다. 그 ‘상처의 흔적’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준 상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상처의 흔적을 그대로 지님으로써 제자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것, 즉 그들의 죄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당신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비로소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괴롭혀왔던 죄책감은 제자들이 입힌 상처의 흔적을 감추지 않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의 몸에 그대로 지닌 채 다시 살아오신 예수의 모습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예수에게 가했던 모든 죄스러움과 상처줌까지도 포함한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것, 심지어 그로부터의 상처줌과 죽임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보고자 했던 토마스는 바로 자신의 죄스러운 과거와 비굴한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예수의 상처로 다가가려고 했던 점에서 ‘그’만의 신앙을 드러냅니다. 


지금 예수님의 몸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인 자신의 죄스러움을 직시하고 대면하고자 했던 ‘그의 바램’이 예수에 의해서 그의 죄스러움이 조금도 장식되거나 감추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체험을 하게끔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로 우리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죄와 악마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분노와 미움, 의심과 질투에서 비롯되는 죄악에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에게 맡긴 형제와 자매들을 죄와 악의 굴레에 몰아가지 않도록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또 용서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자기 고착에 빠진 우리에겐 성령을 보내십니다. 죄를 씻도록 하는 성령, 용서의 은총을 허락하시는 성령,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사실 용서하긴 정말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음 먹은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설사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다시 그와 부딪히면 전보다 더 큰 미움이 앞을 가려 편안치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주신 주님의 영은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의 커다란 물결로 우리 마음의 불안과 갈등 그리고 아픔 속에서 용서하기를 꺼리고 억울해하는 우리를 모두 씻어 없던 것으로 해주실 것입니다.  


토마스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록 그의 태도가 부정적으로 비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적극적인 관심과 애원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확인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서 기쁘게 서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되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는 제자들은 아직도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평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선물이요, 가장 큰 선물이다. 평화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로운 창조의 표지요, 그 결실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오늘날 과학과 이성을 앞세워 초성적, 초자연적 진리를 부인하는 현대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감각과 이성을 훨씬 뛰어넘는 초자연의 세계에 대한 신뢰행위요 하느님의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 대한 믿음이요, 이를 통해서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 인간의 상태를 다시금 새창조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증명해주셨듯이 하느님의 죽음보다 강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에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징표를 요구하는 것은 그분의 이 큰 사랑에 대한 배은이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증명을 십자가사건 이외에 어디서 더 확실히 볼 수 있단 말입니까? 무엇이 부족하여 또 다른 증거를 보자고 합니까? 


십자가의 증표 손과 옆구리 하느님 사랑의 보고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성심의 지워지지 않는 자국과 섬기는 자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던 창조주의 권위를 피조물을 섬기기까지 낮추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손에 인간의 배은과 불신이 남긴 상흔을 보여주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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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사도의 이 손가락이 로마의 예루살렘의 성십자가 성당에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토마의 손가락은 어쩌면 과학과 이성을 앞세워 창조주의 사랑을 불신하는 모든 세대의 상징이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확실한 증명은 신앙의 대상인 초자연적 사실이 과학과 이성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를 뛰어넘는 사랑을 온도계로 측정할 수야 없지 않을까요? 


그러기에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복음의 말미에 요한 복음서를 서술한 목적은 보지 않고도 믿음으로써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잘못은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했다는 점에 있다기보다 보고 증언하는 동료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않은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같은 말씀으로 질책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체험을 토대로 하면서도 체험을 넘어서게 합니다. 눈으로 봐야만,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만 우리가 믿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신앙의 대상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신앙은 그리고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는 눈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만져서 알기 보다 더 분명하게 내 안에서, 공동에 안에서 하느님을, 예수님을 느끼고 확신하는 열린 마음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 눈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고, 그 믿음의 마음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김형진 로무알도 신부 (S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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