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축일 강론
2014.01.04 15:51

2014-1-12-주님세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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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세례축일(이사42,1-7; 행전10,34-38; 마태3,13-17)

 

오늘 지내는 주님의 세례축일은 삼왕내조(三王來朝)와 가나의 혼인잔치와 함께 주님의 공현(Epifania)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으로서 세상 안에 자신을 드러내심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점이 된다. 성탄은 당시 권력자들이나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의 관심 밖에서 일어난 조용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30년간의 나자렛의 예수님의 삶은 침묵과 은둔의 생활이요 타인들과 섞여 사는 보통사람으로 사셨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길들이셨던 것이다. 세례전의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와 똑같은 생활이셨다. 그런데 주님의 세례사건은 이러한 예수님의 평범한 생활국면을 종결짓는 사건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정화가 필요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생활하시고, 더 나아가 죄인의 영역에 자신을 포함시켜 오늘 죄를 씻는 세례예식을 받으신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그리스도는 자비를 베풀어주시러 오셨다.

주님의 세례의 의미는

첫째로, 세례를 받아야할 인간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

둘째로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세례자 요한이 함께 당신을 증명함으로써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셋째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생애에 결정적인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즉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공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이스라엘의 법을 지키셨듯이 스스로 낮추시어 세례를 받으시고 강물 속으로 잠기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씻으신다. 감사송에 있듯이 예수께서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고자 물 속에 잠기셨다.” 이것을 보시는 성부께서는 아주 기뻐하신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언하신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의 작용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물로써 세례를 베풀지만 그분은 성령의 세례를 베풀 것이다.”고 하였다. 성령의 강림은 구원의 길이요, 성령이 모든 기원으로서 물위에 나타나므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가리킨다. 성령은 이미 성탄을 통해 나자렛의 예수 안에 와 계셨다.

즉 성령께서는 마리아 위에 내려오셨던 것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심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와 함께 계셨다. 그러나 이때는 침묵 중에 드러나지 않게 계셨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의 임재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즉 만인이 보는 가운데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셨다. 예수님의 예언적 메시아적 도유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그리스도의 세례성사의 중요성은 아버지의 장엄한 선포와 연결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야훼의 종이(이사40,2) 이제 사랑 받는 아들로 선언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립2,9에서, “이로써 하느님은 그분을 높이시고 모든 다른 이름 위에 빼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선언한다.

이는 주님의 공현의 절정이다. 한낱 별의 인도가 아니라 나자렛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하느님 아버지께서 직접 육성으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로 밝혀주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영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이 선언을 시인한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이러한 신원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의 양자로 만드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의 친아들로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러한 계시의 결론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자.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단순히 듣는 것만이 아니라 실천하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분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세례는 우리에게 두 가지 동기를 제공한다. 하느님께서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신다는 것과 인간도 신앙으로 하느님을 향해 그리스도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겸손하고 숨은 생활을 하던 요한에게 찾아가신 예수님은 신비롭게 빵과 포도주 안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시고 이 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는 오늘 요르단 강에서 요한세자와 함께 이 주님을 맞아들이자.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 저기 오신다!”고 환영하자.

여기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 자신도 어떻게 변화되어 새출발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성찰해 보아야겠다. 그것은 실로 새로운 탄생이요 장엄한 축복인 것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주님으로부터 듣는 감격스러운 은총의 체험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받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날의 감격을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오늘 1독서에서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종이 오면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새 희망을 불어 넣어 주시리라는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세례의 감격이 퇴색되어 혹 냉담 중에 있는 형제들에게 다시금 그 감격을 되새겨주며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형제들에게는 새 희망으로 용솟음치게 하는 복된 소식이다. 오늘 성부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되풀이하신다. 너희는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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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예수님 세례축일 강론에서-

 

공자님 말씀 중에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나를 있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고, 이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십자가에 죽어주시기까지 하셨다는, 실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깨닫는 순간, 이보다 더 놀라운 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세상에 이보다 더 확실한 진리가 있을까? 이 확신의 정도에 따라 인생의 행복의 크기도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이 확신만 있다면 나의 행복은 흔들리지 않으리라.

구약시대의 모세나, 엘리야, 이사야 등 모든 예언자도 메시아가 올 것을 알고는 있었어도 메시아를 보지 못하였다. 그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메시아이신 예수님 시대를 살고 있고 그분의 말씀도 듣고 있고, 미사 영성체를 통해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축복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는가?

또한 영성사의 발달과정을 살펴볼 때, 2000년 동안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하고 기도해 왔지만 그 실현을 보지 못한 세대들보다 오늘날 하느님 뜻 영성을 통해 하느님 뜻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필자가 가장 흠모하고 공경하는 성인이 십자가의 성 요한이다. 그런데 최근 묵상을 통해 성인과 대화한다. “이제는 성인이 부럽지 않습니다. 성인은 갈멜의 산길을 걸어서 진땀을 흘려가며 오르셨지만, 저는 예수님의 에스컬레이터(Escalator)를 타고 오르게 되었으니까요.”

성인의 말씀은, “그래, 그대가 정말 부럽네. 하지만 성덕은 이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 아는 바를 실천해야하네.”

저는 무릎을 꿇고 , 제가 잠시 교만했군요.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하느님 뜻 영성을 비유로 묵상해 보면 이렇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간다고 할 때, “내 뜻으로 가는 것을 마치 걸어가는 것에 비유한다면, 하느님 뜻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은 예수님의 차를 타고 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옆에 예수님이 앉아계시다고 부자유스럽다고 불평하며 예수님 차에서 내리기를 원한다면, 결국 걸어가거나 뛰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힘들고, 시간도 얼마나 많이 걸리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차 옆자리에 타고 간다면 예수님 옆에 앉는 영광을 누리며 황홀감에 젖어 늦어도 2시간이면 충분히 간다.

그런데 예수님이 타고 가시는 차가 무슨 차일까? FIAT이다(이태리 자동차회사 이름이 Fiat).-자동차회사의 주보는 아마도 성모님이 아닐까? 성모님이 최초로 Fiat을 발하셨으니까. 이태리 신학생이 어느 날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가실 때도 Fiat을 타고 가셨다고 농담한 적이 있었다.

-. 예수님의 세례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의미를 되새겨보자.

예수님이 세례를 청하니까 세례자 요한이 사양을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지금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재촉하신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대사제였으며 세습의 관행상 세례자 요한은 아버지로부터 대사제직을 물려받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대사제인(히브리서) 예수님은 대사제 요한으로부터 안수를 받는 것이 필요하였으리라. 또한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 곧 죄사함의 세례요, 예수님의 세례는 불세례 곧 성령세례인 것이다.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세례수인 요르단 강물을 거룩하게 축성하기 위해 당신이 몸을 담가 세례를 받으셨다.

-.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이유를 새로운 각도에서 음미해볼 수 있다. 구약의 제사는 어린양의 피로 속죄제사를 지냈다. 피는 생명이요 속죄의 효과가 있었다. 피조물인 짐승의 피는 유한하므로 죄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바쳐야 했다.

그런데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표현한다. 속죄양인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당신 피를 흘리심으로써 천주성이라는 영원성의 속성으로 바치는 속죄효과는 영원한 것이므로 단 한번의 제사로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사하게 되었다.

 

-. 예수님의 이름(聖名)

탈출기 3,14에 모세가 하느님께 이름을 묻자, 하느님은 나는 나다”(I am who I am-히브리식 표현으로는 I will be who I will be(앞으로도 늘 너희와 함께 할 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시는 분으로 나타내고자 하셨다. 요한복음 사가는 이를 일곱(완전수자)가지로 표현한다. I am message).

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6,41)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3-. “나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다.”(10,7)

4-. “나는 착한 목자이다.“(10,11)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7-. “나는 포도나무다.”(15,1)

 

결국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분(Totus Tuus)이시다.

슬퍼하는 이에게는 위로자가 되시고,

앓는 이에게는 의사가 되시고,

굶주린 이에게는 생명의 빵으로 오신 분이요,

상처받은 이에게는 치유자가 되시고,

고독한 이에게는 친구가 되어주시는 분이시다.

.....

 

이 그리스도가 나를 본 사람은 곧 내 아버지를 본 것이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러 오셨고 그 절정이 십자가 사랑에서 드러났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쏟아 부어주기 위한 그 하나만의 이유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예수님이 루이사에게)

아가서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랑의 신부에 대한 사랑의 비유로 잘 드러내고 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저승처럼 억센 것, 바닷물로도 끌 수 없고 굽이치는 물살로도 막아내지 못하는 것.”(아가8,6)

하느님은 구세주를 보내기 위해 원죄 없는 마리아를 Fiat으로 준비시켰고,

원죄를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같이 원죄를 타고난 피카레타를 준비시켜 하느님 뜻 안에 사는 길을 열어주시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피카레타가 원죄를 타고난 인류로서는 최초로 하느님 뜻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도 그를 뒤따라 들어갈 수 있도록 작업하고 계시는 것이다.

어느 수녀님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뜻의 나라라는 보물단지를 들고 우리 앞에 무릎 꿇고 애원하고 계신다고 한다.

제발, 이것을 받아다오. 그래야 네가 산다. 너는 네 뜻의 독극물(毒劇物)에 중독되어 있으니 어서 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해독제를 먹고 회복하여라. 또한 이 하느님의 뜻은 보약이요 영생불사약이기도 하다. 제발 받아다오. 내가 이렇게 네 앞에서 애원하고 있단다.”

빌어야할 것은 내편인데 예수님께서 내 앞에서 빌고 계신다니 어쩌면 좋으랴!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말자.

세상은 내 뜻이라는 독극물에 중독되어 죽음의 문화에 깊숙이 빠져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인간해방을 부르짖고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이후(14세기~) 하느님 중심의 문화에서 인간중심문화로 넘어가면서 세상은 하느님을 떠난 삶으로 치닫고 있다. “인간중심, 개성존중, 자유등을 부르짖었으나 "하느님으로부터의 해방"(freedom from God)은 참된 해방이 아니요, 그 결과는 19세기 실존주의로 나타나 하느님을 떠난 인류가 개성상실, 인간성 상실의 참담함을 맛보고 이로부터의 회복을 부르짖게 되었던 것이다.

참된 해방은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freedom in God)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이 참자유가 아니요 모든 것을 다 상실하고 짐승의 차원으로까지 전락하는 비참함을 체험한 후에야 아버지 집안에서의 품위 회복과 자유를 그리워하며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다.

내뜻 중독이라는 죽음의 세상에서 마귀의 종살이의 신세를 벗어나, 내뜻 중독을 해소하는 해독제요 영생불사약인 하느님 뜻을 구하여, 하느님 뜻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 자녀요 동시에 상속자가 되어 하느님의 것이 모두 내 것인 백만장자의 나라에 들어가 참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 나아가자.

내뜻의 정체를 이사64,5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처럼 더럽습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신랑으로서 우리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초대하고자 하신다.(묵시19)

어린 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도다.”

이제 하느님 뜻이라는 오필의 금으로 단장한 왕후가 당신 우편에 서있나이다.“고 고백하며 오실 신랑을 기다리자.

성경의 마지막 결론인 묵시록 22장에 내가 곧 가겠다.”고 세 번이나(7, 12, 20) 반복하시며 오매불망 신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시는 우리 모두의 신랑 예수님께 하느님 뜻이라는 오필의 금으로 단장하고, “아멘 오소서, 주 예수님!”하고 화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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