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3.11.12 15:41

32주-수-루카17,11-19: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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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루카17,11-19: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

 

오늘 복음에서 열사람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고쳐 주십사고 청한다. 이 믿음 때문에 그들은 군중들과 격리되어 있어야한다는 법을 위반하면서도 과감하게 군중들을 헤치고 예수님 앞에 다가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제에게 가서 보이라고 명하신다.

나환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순명으로 사제에게 가는 동안 병이 나았다.

그러나 그들 중 9명은 육신병이 나은 것만 기뻐하며 돌아갔을 뿐 감사할 줄 몰랐고,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드렸다. 즉 유다인 9명의 신앙은 아직 미숙한 상태였다.

그들은 외면적인 치유에 집착하였고 자기들의 병을 낫게하신 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즉 그들의 육신병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베풀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인 이방인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이심을 알아 뵙고 얼굴을 땅에 대고 겸손한 자세로 감사를 드렸다. 말하자면 사마리아 이방인만이 성숙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은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건강을 되찾았고 성화되기까지 했다.

우리는 가끔 은총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은총을 주시는 주인공에 대해서 무관심하기가 일쑤이다. 참된 신앙은 겉에 보이는 표징 너머에 계신 살아계신 하느님을 알아 뵙고 감사드리는 자세인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이 치유된 유다인 9명과 사마리아인 1명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다인 나병환자들은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은 아시리아에서 이주해온 타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병이 나은 것을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감사드렸음을 상기시키신다.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았을 때 아시리아의 혼혈정책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의 피가섞인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에게 오랫동안 무시천대 받아왔음을 상기할 때, 예수님이 오늘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고 유다인들을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이라고 한 따가운 이 지적은 유다인들에게 심기를 건드리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

<<묵상>>: 나병환자는 공동체에서 격리했다. 하느님께서 죄에 대한 벌로 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죄로 인해 하느님과 격리된 삶을 살아왔다. 즉 죄인으로 살아온 우리는 영적으로 나병환자나 다름없는 생활인 것이다.

이들은 주님께 달려와 자비를 청했다. 나병은 불치병이므로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으니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아니면 고칠 수 없음을 그들은 안 것이다. 믿음의 외침이었다.

그런데 치유받은 그들의 다음 행위가 중요하다. 유다인 9명은 자신들이 유다인이기 때문에 당연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감사할 줄 몰랐다. 그런데 사마리아 이방인은 주님 앞에 돌아와 엎드려 감사했다. 마치 바리사이가 자기자랑하는 기도를 하는 장면과 세리가 자기죄를 참회하며 자비를 청하는 겸손한 기도를 드리는 대조적인 모습(루카18,9-14)을 연상시킨다.

감사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주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드린 이방인의 태도는 감사의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였고 그 행동에 따른 주님의 은전은 영혼구원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요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은전을 청원할 뿐이다.

은총의 어원은 공짜라는 “gratia”이다.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 믿음의 태도를 보시고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전이다. 감사는 하느님을 감동시켜 그분의 무한한 능력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다.

더구나 고난 중에 감사할 때 하느님은 더욱 감격하시고 은총을 넘치게 채워주신다. 예컨대 마리아 막달레나의 감사행위(나르드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 머리에 발라드릴때), 백부장이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났겠습니다.”라는 믿음행위,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강아지도 주인의 밥상에서 흘러내린 부스러기 빵은 얻어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하는 겸손한 태도 등은 주님을 감격시킨 믿음행위로서 믿음이 감사로 연결된 칭찬받을 믿음이요, 구원이라는 위대한 힘을 이끌어낸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다.

 

...........................

병원 엠블란스 구급차를 운전하는 젊은이가 걸핏하면 불평을 하였다. 위험한 운전을 감당해야 하는 일 자체가 불만스러웠고 위험수당이 적다고 불평을 했다. 어느날 둘째 얘기가 태어났다. 간호사가 아기 손가락을 센다. 손가락 열 개를 달고 나온 것이 어쩌면 그렇게 감사한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감사한 것이 너무나도 많이 있었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병원에 내려놓았다. 안쓰럽게 생각하다가 자기 자신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이, 일상생활이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교통사로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부러진 교통사고 환자를 병원에 내려놓고 안쓰럽게 생각하다가 자기가 위험한 운전을 했지만 지금까지 하느님이 보호해 주셔서 이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느덧 그의 입에서는 불평이 사라지고 감사가 절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불이나 온 가족이 실려 왔다. 또 작은 병원에서 더 이상 자신이 없다고 포기해 버린 환자를 큰 병원으로 옮겨주면서 안쓰럽게 내려놓고 우리가정에는 이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감사였는데 하느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순간순간을 내게 주셨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불평불만 원망이 많았던지 자기 자신의 가슴을 치게 되었다.

오늘 본문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어느 구석진 마을에 나환자들이 모여 살다가 어느 날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 나왔지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나병 환자들이 일반사람들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저만큼 일반인들이 오면 입에 손을 대고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외치면서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이 나환자란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멀리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다.

이 한마디 말 속에 피맺힌 한이 서려 있고 이 환자의 고통이 서려 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병이다. 보고싶은 가족을 볼 수도 없고 먹고 살 길이 막막했고 거지 행세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치료의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희망과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 미래가, 용기가 다 부서졌다.

예수께서 이 고통을 아시고 말씀하셨다.“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가서 보이라대단히 애매한 말씀이다. 병을 고쳐 주시겠다는 건지 고쳐주지 아니하시겠다는 건지? 썩어가는 자신의 몸을 뻔히 보면서 제사장에게 간다는 것은 특별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함부로 나병환자 10명이 예루살렘 한복판 사제를 찾아가다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가는 도중 그들이 가다가 깨끗해졌다.”

오늘 본문의 핵심 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한센씨 병이 나았다는 건 그 당시엔 죽음의 자리 곧 저주의 자리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했느냐? 그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결론은 말씀을 알고 진리를 알고 율법을 배웠던 유대인들 9명은 한결같이 각자 제 길로 가버렸고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한명만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했다.

은혜 입은 자의 위기가 여기에 있다.

많은 하느님의 은혜와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데 너희들도 9명의 유대인처럼 살 수 있을 것이고 1명의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할 수 있는 인생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다.

여기 감사한 이방인 한 사람만이 기적이 구원으로 바뀌어졌다. 병고침이 천국으로 바뀌어졌다. 나병만 고침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고침 받았다. 병 낫고 세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돌아왔더니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품이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생의 어려움을 겪고 병들고 상처입고 쓰러지고 넘어져 예수를 지팡이처럼 의지하다가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응답 받은 다음에는 절대자가 필요하지 않으면 지팡이를 버리듯이 믿음을, 진리를, 예수를 버리는 신자들도 많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병만 고침 받고 도망간 9명의 유대인들도다윗의 자손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낫고 싶은 열망도 있었고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분에게 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고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 “가서 사제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말씀하실 때에 사제를 찾아갈 용기도 뱃장도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병 나은 이후에 한 사람 이방인처럼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병이 나은 다음 9명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뭘 했을까?

동일한 본문에 그다음의 기록은 없다. 그만큼 감사를 잃어버리고 각자 제 길로 가서 살았던 삶,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하는 성경의 증언이다. 이들이 왜 안왔을까?

1. 어떤 이는 정말 나았는지 며칠 기다려 보자. 재발이 안 되어야 나은 것 아니겠는가? 정확히 확인한 다음에 찾아가 감사를 해도 늦지 않지 않은가? 생각하다가 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감사는 즉시 하는 것이다. 따지고 곱씹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

2. 또 어떤 이는 이 몸을 가지고 예수님께 갈 수 없지 않느냐. 집에 가서 목욕하고 새 옷 입고, 계란 줄이라도 사 들고 예수님께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자고 생각한 자도 있었을 것이다.

3. 나병환자로 있을 때 상처 받은 게 많았을 것이다. 무시하는 사람, 돌 던지는 아이들, 배신한 친구, 그놈들 일일이 찾아다니며 복수하다가 예수님께 가는 기회를 잃어버린 자도 있을 것이다.

4. 또 어떤 이는 온 몸이 깨끗해지자 너무너무 기분 좋아서 동리에 들어가 친구들과 어울려 잔치하다가 감살르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5. 보고 싶은 사람 찾아다니며 자랑하다가 예수님 만날 기회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의 교훈은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가운데 믿음 아닌 가짜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위급할 때 성당에 달려나와 부르짖고 기도하고 통곡하고 애원해도 자기 한탄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와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 귀한 일이나 그것이 진정한 믿음, 진정한 은혜로 나아가는 통로가 될 수 있을지언정 눈물 자체가 믿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어떤 결단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한다. 그리고 끝난 다음에 그 결과 여하에 따라서 여러분이 기도한 것이 어떤 관계가 있었나? 만일 예기치 않은 다른 결과가 왔을 때 기도한 것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그래도 감사할 수 있었는가?

병이 나았다. 닫혔던 사업의 문이 열렸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믿음은 아니다. 성공한 다음에 그 다음이 중요하다.

병 낫는 기적을 넘어 구원을 얻는 기적까지 가야 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은혜 받은 기적을 넘어 감사하는 단계까지 가야한다.

만약 오늘 우리가 도망간 그 아홉중에 내가 속한다면 비극이다. 몸이 낫는 기적을 넘어 삶이 치유되고 삶이 변하는 기적까지 가야 한다.

어느 사제가 청년회에 가서 강론을 했다. 그날 강론 내용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표징이다.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청년 한 사람이 사제에게 달려왔다.

신부님 오늘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사건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없는데 왜 그런 설교를 하십니까?

아니 있다고. 아니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아무개 회장님 집에 가 보라고.

궁금증을 안고 젊은이가 회장님 집에 갔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보여 달라고 하니, 자기를 가리키며 여기 있지 않냐고하였다.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자기가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부도를 만나서 술 한잔도 못하던 그가 술독에 빠져서 알콜 중독자가 된 것이다. 그랬더니 이게 물이 변하여 술로 바뀌어진 것 아니냐 그 얘기이다.

그러다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다. 친구신자를 만나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믿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개과천선하여 알콜중독병을 고쳤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알콜중독자가 술 한잔을 먹지 않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고 포도주가 변하여 물이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주님 안에서 기적을 경험했으면 삶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야 할 것이다.

-.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를 잊은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구절이다.

가족 중에 한사람만 교회에 나온다면 네 남편 어디 갔니? 네 자녀 어디 갔느냐? 네 가족 어디 갔느냐?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신다.

병 나은 것만 감사할 것인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지 않았느냐.

소중한 가족을 주셨고 귀여운 자녀들을 허락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은혜 받은 그 다음 무엇을 하였나?

받은 은혜 감사할 때 그 은혜는 완성되는 법이며 감사는 축복의 완성이며

감사는 받은 축복의 매듭이요 감사는 구원의 완성이다.

예수님께 돌아와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을 얻은 복이다.

세상 다 얻고 예수님 잃으면 다 잃은 것이다.

세상 다 잃고 예수님 얻었으면 다 얻은 것이다.

영원한 복은 오직 예수 안에 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요한 21장의 베드로 보자.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는데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실패의 밤이었습니다. 그 실패를 통로 삼아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고 예수님 만나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그 다음에 잡은 고기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또 만난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예수님을 모른다 또 부인한다. 무서운 배신 죄를 짓는다. 그러나 다시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난다. 이게 은혜 입은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는 실패 때문에도 예수님을 만나야 된다. 인생 살다가 어떤 실패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 실패를 가슴에 끌어안고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산다. 실패 안고 세상으로 가면 망한다. 기껏 가는 게 포장마차 아니었는가? 거기에 응답이 없다. 실패를 안고 주님께 찾아와야 산다.

마찬가지로 성공 안고 세상으로 가면 안 된다. 제 잘난 멋에 살면 안 된다.

어떤 성공을 하였든지 간에 성공을 가슴에 부둥켜 안고, 승리의 감격을 가슴에 끌어안고,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산다. 그래야 그 복이 진짜 복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죄를 짓고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된다.

무서운 배신을 하고도 예수님을 얻으면 그게 성공이다.

그게 신앙인의 모습이요 베드로의 모습이었다.

왜 예수님께서 그 아홉을 찾는 것일까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아홉 명 마저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감사의 깊이만큼 성숙한 사람이요 감사의 크기만큼 행복한 사람이다.”(죤 밀러).

 

한 시인의 <감사>란 짤막한 시가 있다.

 

감사 만이 꽃길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걸어가는 향기 나는 길입니다.

감사만이 보석입니다.

슬프고 힘들 때도 감사 할 수 있으면 삶은 어느 순간

보석으로 빛납니다.

감사만이 기도입니다.

기도 한 마디 드리지 못해도 그저 고맙다 고맙다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 날 삶 자체가 기도의 강으로 흘러

가만히 눈물 흘리는 자신을 보며 감동하게 됩니다.”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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