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5.02.06 20:20

201502-7-평화의 모후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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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모후 복되신 마리아(이사 9,1-6; 루가 1,26-38)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시라면 그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평화의 모후인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은 평화이다. 그런데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잠시뿐이고 불안한 평화이지만, 천상적 평화는 세상의 어떤 장애에도 방해받지 않는 영구적인 평화이다. 순교자들이 누리던 평화가 바로 이런 평화였다. 그런데 이 평화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얻어낸 값비싼 평화요 우리에게 주시는 고귀한 선물이다.

오늘 전례에서 화답송에 하느님의 자비와 충성이 마주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함께 입 맞추리라.”고 노래한다. 정의와 평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즉 정의 없는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평화 없는 정의는 살벌하다.

마리아는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 주시고 그리스도의 첫 제자로서 사도들 위에 으뜸으로 계시면서 평화의 사도단을 이끌어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시고 어머니가 되셨다. 성부께서 약속하신 일치와 평화의 성령의 정배가 되시어 갈라지기 쉬운 인간 본성, 둘이도 서로 일치가 어려운 인간의 본성적 나약함을 화합과 평화로 이끄시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계신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이 개입하셔야만 하고 성모님의 중재로만 가능한 것이다.

엄마가 꼬마들에게 떡 한 조각을 주면서 둘이서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고 하면 엄마 눈을 피해 둘은 어느덧 한 덩어리가 되어 싸운다. 힘센 놈은 약한 놈의 몫마저 뺏어 먹으려고 하고 약한 놈은 강한 놈에게 안 뺏기려고 싸우다가 그만 떡은 땅에 떨어져 너도 나도 못 먹게 되어 버리고 만다. 참 평화는 성모님의 중재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대가로 주시는 참사랑의 정신,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한 사랑의 원리뿐인 것이다. 이세상이 물질적인 풍요는 누리면서도 날로 평화를 상실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이 날로 하느님 뜻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인간의 욕심은 날로 동물적 차원으로 자기만족만을 찾는 세상으로 변하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생명을 저해하는 범죄가 날로 치성하여 부모에 의해 낙태가 자행되고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자는 여론이 거세어지고 불륜적인 퇴폐풍조가 날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윤리의식이 희박해져가는 세상이다. 가난한 나라의 굶주림을 외면한 채, 강대국 간에는 무기경쟁, 핵개발, 우주선 개발 등으로 막대한 자금을 소모하고 있다. 진정한 평화는 협상이나 무기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임금, 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머니 품을 벗어난 민족들이 다시금 엄마 품에 돌아오는 것이 평화의 원천적인 지름길이다. 갈라져 나간 형제들, 무신론 공산주의로 평화의 왕을 저버리고 전쟁을 일삼는 사탄의 노예가 된 탕아들이 인류의 어머니 성모님 품으로 다시 돌아올 때 세계평화가 정착될 것이요, 성모님께 지상면류관을 씌워 드리게 될 것이다.

한국경제상황도 정치적인 상황도 사회분위기도 그 무엇도 불확실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평화의 모후이시오 우리나라의 주보이신 무염시태 성모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평화적인 통일을 주십사 기도하는 동시에, 한국땅에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혜를 우리 모두가 겸손되이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축복으로 평화통일은 물론 외교인들이 귀화하고 갈라진 형제들이 모교회의 어머니의 만또 아래 모일 수 있도록 민족복음화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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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가시어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시며 인사하셨다. 수난당하실 때 요한사도 외에는 모두 도망갔던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도 계셨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시는 주님이시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 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평화는 화해와 용서를 전재한다. 화해는 하느님과의 수직적 화해와 인간끼리의 수평적 화해가 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 화해는 죄에 대한 회심과 하느님 자비에 대한 의탁에서 비롯된다. 우리 죄가 진홍색같이 붉어도 눈같이 희게 해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데서 평화와 기쁨이 온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는 무엇일까? 십자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다교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을 하느님의 정의라고 믿고 실천해온 종교이다. 그렇다고 구약성경이 유다교의 경전이요, 신약은 그리스도교의 성경 이라고 도식화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구약성경이 모두 그리스도교의 성경이요,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만 유다교에서 하느님을 십자가 없는 정의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일 뿐, 하느님과 동일본체이신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불완전한 종교요, 그리스도교는 유다교를 십자가의 신비로 완성한 종교라고 이해해야할 것이다.

구약성경에도 이사야53장과 같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과 같이 메시아의 십자가 예언이 언급되고 있다. 유다교의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오해를 재해석한 마태오5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등의 말씀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의 참의미를 재해석해 주셨다.

하느님과 인간의 수직적 평화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등을 돌렸던 인간이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섬으로 얻는 평화이다.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과 갈라지게된 시발점은 아담의 원죄로부터이다. 원죄 이후 인류에게 하느님 마음과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고 거기서 갈등이 비롯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나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데서 찾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이 동정잉태라는 전대미문의 하느님의 요청을 수락하라는 대천사의 권유앞에 당황하지만,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저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자기 뜻을 굽히고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의 수직적 평화가 이루어지고 생애동안 하느님을 아들로 키우면서 실로 알아듣지 못하는 행동과 말도 많았을 것이다.

예컨대 예수님이 12살 때 과월절 행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예수를 잃고 사흘 동안 헤매다가 성전에서 발견하고 왜 이렇게 아버지와 나를 애태웠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대답에 성모님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뜻을 깨닫기까지 침묵을 지키며 오직 주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살아갔다.

십자가의 아들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침묵 앞에 다만 주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성모님의 모습이 진정한 하느님과의 화해와 평화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수평적인 인간관계에서, 인간끼리의 상호양보와 타협에 의한 평화는 불안하며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평화일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 창설자 신부님의 말씀처럼, 진정한 평화는 나와 너의 타협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라는 삼각의 정점에서 이루는 평화만이 참된 평화이다.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는 영구적이며 세상의 환경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평화이다. 그러므로 인간끼리의 평화도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라야 영속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르고 십자가를 감수하여야만 한다.

평화는 용서와 화해가 전제된다.

한일관계에서, 2차대전의 전범국 중에서 피해국가들에게 대해 사과할 줄 모르는 유일한 민족인 일본을 가끔 민족적 양심이 없는 구제불능인 민족이라고 단죄할 때가 많다.

그런데, 제가 수련받을 때 성지안내를 하곤 하였는데, 일본 나카사키 천주교 신자들이 가끔 미리내 성지순례를 와서 김대건 신부님 무덤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유해에 친구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었다. 이렇게 일본 천주교 신자들은 한국 땅에 찾아와서 한국 성인 무덤에 무릎을 꿇고 유해에 친구한다.

우리 수도회에 바오로 미키 수사님이 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미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본명성인을 일본 성인으로 선택하였다고 한다.

 

2차대전시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자매가 천주교신자라는 이유로 잡혀들어가 언니가 참혹하게 고문당하다가 죽는 모습을 동생이 지켜보았다. 전후 유럽의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동생은 평화의 선교사로 각국을 돌며 주님의 평화와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주님이 독일로 가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하셨다. 전범국가라서 가기 싫었지만 주님의 명을 따라 여러 성당을 돌며 메시지를 전하고 끝나면 군중들과 허그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어느 성당에서 연설을 마치고 두 줄로 서서 나오는 인파 중에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기억을 더듬는 순간 갑자기 소름이 끼치며 경련이 일어났다. “내 언니를 고문하여 죽인 살인범!”. 그 순간 손이 떨리며 난 못해요, 저 인간하고는 화해할 수 없어요!” 주님이, “그래도 해야 한다!” “못해요.” “해야 한다!”, “못해요~”, “너는 눈을 감고 다만 손만 내밀어라. 내가 해주마!”

어느덧 그 남자가 자기 앞에 와 서있는 것이었다. 선교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 남자도 이 선교사를 알아보고 흐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둘은 얼싸안고 뜨거운 포옹으로 극적인 화해를 하였다.

그리스도 신앙만이 원수를 사랑하고 참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단적인 예이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으신 성모님은 평화의 모후로서 전쟁과 불목으로 상처입은 인류의 어머니이시니, 어머니께 자모적 사랑으로 사랑의 손 얹어주사 상처를 어루만져주시고, 당신 아드님께 치유와 화해를 전달해주시기를 청원하자. 특히 오늘날 온 인류가 상처로 얼룩져 있다. 특히 이시대의 가장 큰 죄악인 낙태죄로 전혀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어린 생명이 모성애로 보호해주어야 할 엄마에 의해 살육당할 때 그 상처가 얼마나 크겠는가?

육신의 엄마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생명들이 하늘엄마께 호소하는 부르짖음이 하늘엄마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을 위로하자. 그리고 생명의 주인이신 평화의 왕 주님께 전달해주시도록 청하자. 지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혹은 지우려다가 실수해서 낳은 자녀들이 엄마로부터 모태에서 받은 상처가 평생 그의 삶을 어둡게 이끌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문제아를 만들어간다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이 상처의 치유를 하늘엄마께 의탁하고 예수님 십자가 피묻은 손으로 어루만져주시어 치유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십자가를 통한 진정한 평화가 상처로 얼룩진 이 세상을 정화하고 화해와 용서로 상처가 아물고 평화가 정착되도록 기도하자.

어떤 도둑이 집을 털러 빈집인 줄 알고 들어갔다. 그런데 주인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도둑이 당황하여 얼떨결에 손을 주머니에 넣어 무엇인가를 찾는 시늉을 하면서 손들어!” 하니까, 주인이 죄송하지만 제가 오십견이 와서 손을 들 수가 없거든요!” 하니까, 도둑이 , 마침 내가 오십견을 얼마 전에 앓았는데 오십견을 한방에 치료하는 용한 한의사를 내가 압니다.” “그래요? 어딥니까?” “같이 갈래요? 따라오세요.” 둘은 한약방으로 갔다. 도둑이 한방의사에게 소개를 하며 잘 치료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침을 맞고 맛사지를 하고 나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도둑은 환자를 바라보며 만족해하면서 오늘 치료비는 내가 내겠습니다.” 하고 반갑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도둑과 오십견 환자와의 화해, 전혀 불가능할 것 같으면서도 얼마나 유머러스하고 여유있는 화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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