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10.02 21:58

2014-10-3-성시간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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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시간에는 욥기 전반에 대해 살펴본다!

 

욥기는 신앙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정리- 우주적인 진리 선포한다. 천상천하를 오가며 영계와 땅의 비밀을 물감처럼 풀어낸다. 무대는 하느님의 어전이다.

욥기가 다루는 문제들은 세계종교들의 공통주제인 셈이다.

1-. 과연 인간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신을 섬길 수 있는가?-기복신앙의 문제

2-.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왜 의인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신정론(神正論)의 문제

3-.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은혜의 신인관계-죄와 벌의 관계, 율법이냐? 은혜이냐?

하느님과 사탄이 대화한다는 것 자체도 어려운 주제이다. 천상의 것을 세상에서 이해시키려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일일이 물어보지 마라. 나는 창조주요 너희들은 피조물이다. 너희의 유한성을 인정하여라!”

하느님: “내가 왜 욥에게 북두칠성, 오리온 별자리, 우박, 천둥, 번개, 나일강이 범람할 것을 아는 따오기, 악어, 들소, 타조 등에 대해 질문한 줄 아느냐? 나는 창조주다. 그러니 네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묻지마라!” 하고 타이르신다.

바로 이때 우리는 욥처럼, “이 썩을 가죽 바깥에서 하느님을 뵈옵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할 것이다.

 

* 내용

욥은 당대 거부였으며 신앙의 거장이었다.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의 거장도 더 성장할 여지가 있었다. 인과응보, 즉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에 입각한 하느님의 신앙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믿음은 착하게 사는 수준이라는 윤리종교의 차원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사탄과의 대화에서 욥의 고난은 시작된다.

욥의 신앙은 대가를 바라는 신앙이냐 아니냐?”즉 기복신앙이냐 아니냐?의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된다. 사탄이 하느님께 항의한다. “욥에게 고난을 주어보십시오. 그러면 욥도 하느님을 저주하고 돌아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탄에게 그를 시험해보라고 허락하시므로 욥의 신앙이 시험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방종교가 갖고 있는 기복신앙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이것은 바알과 아세라 신앙에서 나타날 이방 종교의 핵심이자, 그리스도교와의 갈림길이다.

 

2-.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초바르)와의 논쟁(3~31)

1). 논쟁의 1라운드(3~14)

인간 욥은 고통을 통해서 인생을 배우며 신앙의 깊은 경지로 깊이 들어간다.

세 친구들의 논쟁의 요지는 , 자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만한 잘못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인과응보적인 신앙관이다.

그런데 욥은 아닐세, 내가 지금 당하는 벌만큼 죄를 짓지는 않았네라고하며 욥도 역시 같은 인과응보적인 잣대로 하느님을 재어본다. 욥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2). 논쟁의 2라운드(15~21)

욥은 새로운 문제제기를 한다. 악한 사람이 더 잘사는 현실을 고발한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더 잘 사느냐?”(21,7)

자신의 고난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명제를 찾아내어 인생을 관조하기 시작한다. 욥의 신앙이 깊어가는 것이다.

 

3). 논쟁의 3라운드(22~31)

엘리바스를 비롯한 세 친구들은 여전히 욥을 인과응보적인 관점에서 몰아부친다. “까닭없이 친족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옷을 빼앗아 헐벗게 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 한 모금도 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22,6-7).

욥은 오죽 답답하였을까?

욥도 이제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았으며(31,1~12), 사회적으로도 의롭게 살아왔으며(31,13~23), 종교적으로도 하느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바르게 살아왔음을(31,24-28) 친구들만이 아니라 하느님께 항의한다. 답답한 나머지 욥은 하느님께 소송장을 낸 것이다.

 

3. 엘리후의 연설(32~37)

엘리후는 가장 연소했기 때문에 듣고만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어 세 친구 모두를 반박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한다.

연설1-욥 어른, 하느님께 대들지 마시오(32~33)

연설2-세 친구들이여, 하느님의 공의와 지혜를 기억하시오(34)

연설3-욥 어른,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더 배우셔야 합니다.-1(35)

 

4. 하느님의 연설(38,1~42,6)

드디어 침묵하고 계시던 하느님이 입을 여신다. 동문서답식의 질문을 하신다. 자신의 고난의 이유에 대해 질문한 욥에게 하느님은 자연계에 대한 질문으로 응답을 하신다.

 

첫 번째 연설-창조에 선포된 하느님의 전능하심 vs 욥의 고백(38,1~40,5)

땅의 기초에 대해서, 별자리에 대해서, 바닷물에 대해서, 눈과 비에 대해서, 사자와 까마귀, 염소, 들 사슴, 타조, , 독수리 등의 웅장한 우주전체의 신비에 대해 하느님은 욥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에 대해 욥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손으로 입을 막는다.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자신이 만든 신관-의롭게 살면 복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알았는데 왜 이런 고통이? 자신의 존재의 근거로 삼았던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면서 자신의 존재의미마저 상실하여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기까지(3,1)- 신관의 위기.

 

욥은 29-31장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영적교만.

이에 하느님은 38-39장에서 하느님은 네가 누구냐?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 자는 누구냐?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시며, 땅과 바다와 빛과 어두움, 기후, 하늘의 주재자, 동물세계의 주재자로서 당신의 절대적 주권을 장엄하게 선포하자,

욥은 40장에서 유구무언,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번 말씀 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 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하며 유구무언,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납작 엎드린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의 넘을 수 없는 한계이다.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지존하신 엄위 앞에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 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하느님께 항의하는 것은 하느님을 단죄하는 것이 아닌가?

 

두 번째 연설-하느님 vs 인간, 욥의 겸손(40,6~42,6)

하느님은 베헤못과 레비아탄에 대해 질문을 계속 던지신다. 이 때 욥은 완전 항복을 선언한다. 그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을 했다고 공식적으로 하느님께 잘못을 고백하고,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서 참회합니다.”(2-5) 라고 자신의 경솔을 시인한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욥의 하느님 인식이 귀의 차원에서 눈의 차원으로 향상된 것이다.

 

지금까지 욥도 세 친구들도 하느님은 인과응보로만 다스리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악인들을 벌 주시고, 의인들을 상 주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깨달은 하느님은 그 인과응보의 원리를 뛰어넘으셔서 때로는 의인들에게도 고난을 주시는 분이시고, 악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실, 복음이다. 죄인들도 은혜의 원리에 의해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욥기는 복음서의 원리를 머금고 있는 것이다.

 

5. 마지막 무대-결론: 욥을 회복시킴(42,7~17)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원리로만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고집스럽게 욥을 단죄하였던 친구들을 책망하시며 욥의 중재기도로 용서를 받게 하신다.

또한 욥의 말년에 이전 보다 더 많은 축복을 내려주신다.

욥기의 교훈은 우리의 신앙이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의 차원을 넘어 악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며 의인에게도 고난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고, 하느님은 행위로서가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복된 소식(복음)을 깨닫는 것이다.

....................................................................

 

<<묵상재료>>: 욥의 고난의 한밤중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35,10-11)

 

PGA 골프 선수 중 짐바브웨 닉 프라이스는 슬럼프를 모르는 선수로 유명하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어려울 때는 휘파람을 불라고 가르친 덕분이다.

원망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한다.

인생의 어둔 밤을 한탄하는 그 시간에도 믿음의 사람은 그 밤에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깊은 밤에 절망의 나락에서 희망을 노래를 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바오로 사도가 실라스와 함께 필립비에서 복음 전하다가 박해자들에 두르려 맞고 감옥에 갇혀있을 때 한밤중에 일어나 실라스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듯이 고난의 순간에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그리스도교는 노래로 시작하여 노래로 끝을 맺는 종교다.

(장례식장에서도)

 

-. 고난의 종류

1-. 내 탓으로 연유된 고난

2-. 애매한 고난-옆집 불이 내 집에 옮겨 붙은 경우- 이 경우에도 하느님의 편에서 고난의 이유가 있다고 믿자.

3-. 선을 이루기 위해 자원하는 고난-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4-. 욥의 고난-의인의 고난

 

-. 욥의 고난

1-. 재산을 잃음

2-. 자식을 잃음

3-. 아내, 친구-저주하고 떠나 가버림.

4-. 건강상실

 

-. 욥의 한계상황 -한탄-“탄생을 저주”(3,1)

 

-. 엘리후의 충고

고난의 밤을 허락하신 분-하느님

하느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

고난-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성숙시키는 지혜

자연계--식물에게 꼭 필요. 꽃피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창조지혜

인생-밤이 필요-고난 없다면 인생의 꽃이 없다.

밤이 없으면 신앙의 열매가 영글지 못한다.

시인 테니슨: 고난이라는 용광로-신앙을 정화하는 도구.

인격을 용광로에서 녹아지는 쇠붙이에 비유한다.

성경의 인물들 중 인생의 밤을 거치지 않은 인물은 없다.

채광석-용광로에서 순금으로 정련된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고난의 밤을 거치게 한다.

-. 엘리후가 발견한 하느님-밤중에 노래하게 하는 하느님(35,10)

밤에 부르는 노래-낮에 부르는 노래와 다르다.

-만물이-고요 속에 침묵. 칠흑같은 어둠. 고독, 외로움, 처절한 실패와 눈물뿐.

감사, 감격의 눈물-하느님께 노래로 승화-신앙

: 바오로 실라스와 한밤중에 감옥에서 찬양.

 

-. 밤중에 부르는 노래

1-. 환란을 통해 하느님을 더 가까이서 만난 행복의 노래. 고난 중에 하느님이 동행하심을 경험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신앙-“그러하지 아나할지라도의 신앙(다니3)-사드락, 메삭, 아벳느고-풀무불 속을 거닐 때 사람의 아들이 함께 하심.

2-. 위로, 치료하는 희망의 노래

Henry Nowen-“The wounded healer"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상처받은 분으로서 인류의 상처 치유자가 되신다.

상처-사명, 능력

대개 심한 질병 앓은 경험자가 능력 있는 치유자가 된다.

마귀들렸던 사람이 치유받고 구마능력을 받고 사역한다.

 

3-. 밤에 부르는 노래의 주제

고난의 밤 중에 내 영혼이 밝아지는 노래 -M. Luther King-

 

“We shall overcome some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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