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04.06 15:02

2014-4-7-사순5주-월(요한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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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5주-월(요한8,1-11)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 가셨다. 수난을 앞두고 낮에는 예루살렘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다시 산에 가시어 기도하시며 인류구원의 마무리작업을 하시는 중이다. 그런데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이 찾아와 시비를 거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용서하시는데 인간은 고발한다. 하느님 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고발하겠습니까?”(로마8,31) 여기서 성경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시험한다.”고 하여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진퇴양난의 질문을 한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와 예수님께 이런 여인은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있다는 율법서의 내용을 지적하며 예수님의 생각을 물었다.

그들은 성경을 수박 겉핥기로 읽었다. 하느님의 마음의 진실은,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색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고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1,18)는 십자가의 도리를 그들은 모르고 있다.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리라.”(이사55,7)

그들은 예수님께 선생님하고 다정하게 부른다. 비수를 머금고 있는 독사의 간교한 혀로 말이다.

돌로 치라하면 하느님 자비에 걸리고, 하지 말라하면 율법에 어긋나고...

지금 예수님 편은 아무도 없다. 부정으로 가득 찬 그들 그 중에는 이 간음한 여인과 공범도 끼어 있으리라.

자신의 죄는 낭만이고 남의 죄는 죽을 죄라는 고발하는 인간의 모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면...

예수님은 말없이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신다. 잠시의 침묵이지만 인간들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으로 느껴진다. 손에 땀을 쥐고 초조하게 가슴이 뛰는 영혼은 그래도 회개의 기미가 보이는 영혼이다.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말씀을 쓰고 계신 것이다.

이윽고 일어나시어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라는 조용한 폭탄선언으로 그들을 제압하신다.

과연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지혜로운 말씀이다. 그들의 올가미를 껑충 뛰어넘는 촌철살인의 비수를 그들의 양심에 꽂으신 것이다.

세상법정에서 예수님께 고발한 자들이 이제는 양심법정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고발당하였다. 올가미를 씌우려다 오히려 예수님 앞에서 그들의 죄상이 드러나 버렸다.

다시 주님은 머리를 굽혀 또다시 땅에 무엇인가 씌시기 시작하신다.

아마도 나도 너희를 고발하지 않을 터이니 이제는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라.”하지 않았을까.

다 도망가고 이제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다.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속일 수도, 속을 수도 없는 관계이다. 이 여인은 바로 나다.

나와 예수님관계는 군중들과 무관하게 단독자로 만나는 것이다. 군중의 발길에 채이고 구설수에 채이면서 쫓기며 살아온 내가 예수님과 단둘이 만날 수 있는 관계를 의식하고 사는 영혼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단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들을 보내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기 위함”(요한3,16)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큰 용서 앞에 모든 것은 침묵할 수밖에 없고 단죄의 돌을 움켜쥐었던 손에 맥이 풀려 사라질 뿐이다.

이 광경을 보며 우주만물은 오히려 그 여인에게 어서 속히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로마8,22)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너에게 돌을 던지려던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를 고발하겠습니까?”(로마8,35)

폭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처럼 부드러운 예수님의 음성은 죄의 종살이에 묶여 만신창이로 망가진 이 여인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충분하였다.

십자가아래 인간의 죄악이 할퀴고 망가뜨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엄마 품에 안겨 예수님이 느끼시게 될 포근함을 미래의 경험을 앞당겨 현재로 체험하시는 당신의 전능으로 이 여인에게 주시는 것이다.

여인은 대답한다.“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이미 주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한다.

주님은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이 여인의 자리에 나를 올려놓자. 주님은 나를 단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고 회개시켜 살리려고 왔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죽음이기때문이다.(로마6,23)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보자. 율법은 돌로 쳐라고 하지만, 복음은 정죄하지 않겠다이다. 요한 8,11은 율법서와 복음시대의 경계선이다.

무거운 짐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리라.”(요한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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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5주-월(요한8,12-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고 하신다.

성막은 세 구역으로 구분 되는 데 즉 성막뜰과 성소와 지성소가 그것이다.

성막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고 사제가 제물로 바칠 짐승을 잡아 번제를 바치는 곳이고, 성소로 들어가면 왼편에 등잔대가 있고 오른쪽 맞은 편에 제사상이 있고, 지성소 앞쪽 휘장 앞에 분향단이 있다. 성소에는 창문이 없어 등잔대의 불을 밝히지 않으면 캄캄하다. 성소의 기물들은 모두 금으로 장식되어있다.

그러므로 등잔대에 불을 밝히면 성소전체가 휘황찬란하게 빛이 난다.

이는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빛으로 환히 밝혀줄 때에만 세상이 옳고 그른 사리분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등잔대는 가운데 큰 촛대가 서있고 양쪽으로 세 가닥씩 여섯 가닥으로 등잔대가 솟아나와 있다. 가운데 예수님을 상징하는 촛대가 우뚝 솟아 불을 밝혀주고 양 옆의 인간의 등잔대가 주님의 불빛을 받아 불을 반사적으로 밝혀줄 때 세상은 밝게 환히 빛나게 될 것이다.

이 등잔대는 우리 마음의 성전에서 양심불을 가리키기도 한다.

마음에 양심불이 밝혀질 때 우리 마음은 비로소 올바른 양심으로 사리분별을 밝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은 아전인수격으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판단하고 비양심적으로 변하기 쉽다.

이를 그릇된 양심 혹은 시쳇말로 가슴에 털난 양심혹은 녹슬은 양심이라고 한다. 인간의 양심불이 여섯 가닥인 것도 6이라는 숫자는 7이라는 완전 숫자에 비하여 하나가 부족한 숫자이다.

사실상 우리가 양심껏 산다고 하지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을 전제하지않는다면 숨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을 정당화하고 겉으로는 양심대로 산다고 시침이 떼기가 일수인 것이 솔직한 고백일 수밖에 없다. 유교에서도 혼자 있을 때 마치 하늘이 나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쳤고, 구한말 타락한 양반들의 두 얼굴의 수치스러운 타락상을 폭로한 소설이 영반전이다.

낮에 점잖게 행동하는 양반들이 밤으로 온갖 추잡한 패륜적 행동을 하는 타락한 양반세계를 풍자한 소설이다. 하느님의 빛의 거울 없이는 인간의 양심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안전인수에 흐를 가능성이 많다.

크리스찬들은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을 분명히 인정하고 양심거울에 비추어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살기 위해 양심성찰을 하루에도 3번씩 거듭하는 것이다.

이 근거가 바로 오늘 주님의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 양심거울을 오늘도 주님의 밝은 빛에 비추어 빛 가운데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언제나 대낮처럼 살아갑시다!”(로마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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