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묵상(평일)
2014.02.14 15:29

2014-2-15-5주간 토-마르8,1-10-빵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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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간 토-마르8,1-10-빵의 기적

 

1-마르코 복음은 첫 구절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대명제를 앞에 내세우고 그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기적사화를 연이어 소개한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귀먹은 반벙어리를 치유한 기적 다음의 빵의 기적사화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따라 군중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든다. 그런데 그들은 먹을 음식도 준비하지 않은 채 예수님 뒤를 따아다니는 것이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하시며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고 측은해 하신다.

이를 육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식사도 못하고 예수님의 행적에 감동하여 따라다니는 군중들을 보시고 애처러워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인 빵의 기적이 요한복음 6장에서는 성체성사의 예표로 소개되고 성체성사에 관한 긴 설교말씀이 이어진다.

사실은 빵의 기적이 주목적이 아니라 성체성사를 말씀하시고자 구약의 만나의 기적과 함께 성체성사에 주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만나의 기적이나 오늘복음의 빵의 기적은 다 성체성사를 위한 예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 굶주린 백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의 정은 단지 육신적 굶주림에 대한 걱정만이 아니라 오히려 영신적 굶주림을 측은히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시고자 하시는 영적인 관심사로 이해해야 더 타당할 것이다.

어느 선교사가 북한에 식량난을 돕기 위해 쌀과 밀가루 등 식량지원을 하였더니, 그들 중 지하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식량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말씀과 생명의 양식에 굶주린 백성들의 호소인 것이다. 오늘날도 말씀과 생명의 양식에 굶주린 백성들이 영적 양식을 찾아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양떼들의 허기진 모습을 보고 예수님처럼 그들을 측은히 여길 줄 아는 착한 목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며,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이 빵은 내 살이다.”(요한6,51) 하셨다.

예수님은 성체성사로서 세말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다.

 

2-성체성사 제정

세말까지 우리와 함께 게시기 위한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 성체성사이다. 예수님의 기발한 아이디어이다. 먹기 쉬운 빵의 형상으로 마시기 쉬운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니 얼마나 우리를 생각해주신 배려인가? 만일 살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실제 피로 오신다면 누가 감히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겠는가?

교회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는 방법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할 때나 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나 성사를 집행할 때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도 성체 안의 현존이 가장 실재적이고 본체적이며 완전한 현존이라고 할 수 있다.

칠성사 중 다른 여섯 가지 성사는 신자들로 하여금 활동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하는 의식이라면 성체성사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하여 성 토마스는 성체는 실제로 그리스도 자신을 내포하고 있으며영성생활의 완성이요, 모든 성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어제의 예수님(삶과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는 기념제요, 오늘의 그리스도(부활과 현존)를 기리는 찬양제이며, 내일의 주님(재림)을 기다리는 희망제이다. 성찬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우리 님을 모시고 님 따라 살기로 다 함께 다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한마당 축제인 것이다.

 

3. 성체성사의 의미확장

성체의 신비는 천주성자 강생의 신비의 연장이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 베들레헴 외양간에서만 강생하려하지 않으시고 세상마칠 때까지 온 세상 방방곡곡 만민의 가슴 속에 강생하시길 원하신다. 그 방법이 성체성사인 것이다.

성자께서 강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원죄로 인한 인간의 죽음과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심이다. 더 나아가 하느님과 일치하여 인간신화(人間神化)를 이루는 것이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시켜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며(Divinisatio), 그리스도화(Christoficatio)하는 것이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하느님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당신 인성으로 우리 인간성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를 당신 신성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해 성체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요한6,54)고 하셨다.

성체는 영생불사약이다.

원래 보약이란 병을 고치기도 하지만 몸을 튼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성체도 이같이 인간이 오욕의 불을 끄고 칠죄 중에서 벗어나게하는 치료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굳세고 튼튼하고 용감하게 하는 보약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외 아드님은 우리가 당신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사람이 되심으로서 우리가 신이 되도록 우리 인성을 취하셨다.”고 했듯이 이러한 인간신화를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으로서의 육화가 필요했고, 더 구체적으로 빵의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강생하심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성체성사는 인간혁신의 수단이다. 즉 성체성사는 인간이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 입도록 하고”(골로3,9),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마태5,48)하는 새 인간창조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마음으로 새 사람이 되라.”(로마12,2; 골로3,9; 에페4,24)고 역설하며, 새로운 인간을 위한 인간, 그리스도를 닮은 인간, 즉 사랑의 인간이다.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먹어야하고 사랑이 되기 위해 사랑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4. 성체를 영하기 위한 준비

영성체는 하늘과 땅의 결합이요 빛과 어둠의 결합이요, 생명과 죽음의 결합이요, 가치와 허무의 결합이요, 임금과 종의 결합처럼 지극히 높은 자와 비천한 자의 결합이니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이겠는가!

빈털털이 방랑자가 부자를 만난 기쁨이요, 앓는 사람이 의사를 만난 기쁨이요,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본 반가움이요, 목마른 자가 옹달샘을 만난 감격이라”.

영성체를 통하여 천주성자가 성모께 잉태되었듯이 우리 마음 속에서도 강생의 신비가 재현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마니피캇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은혜가 내리지만 우리가 합당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보배는 비오듯 쏟아지나 받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다.”라는 말처럼 성사를 통한 하느님 은혜가 비록 바닷물처럼 많다 해도 우리의 받을 그릇이 작으면 그 이상 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한 홉 짜리는 한 홉, 한 되짜리는 한 되, 한 말짜리는 한말 이상 더 받을 수 없다.

 

5. 성체를 영한 자의 의무-성체의 삶

성체를 영한 자는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한다. 성체(Eucharistia)란 말은 어원상 감사한다는 뜻이다. 감사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주여, 주여 부른다고 모두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마태7,21),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잘라 버린다(루카13,7)고 했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야고2,17)라고 했다. 열매를 맺으려면 두 가지 의무를 완성해야 한다.

성찬례 중의 놀라운 변화란 우리가 그리스도화 되는 데 있는 것이다. 보통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듯이 보통 사람인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음식을 먹으면 내가 자라지만 성체를 영하면 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는 점점 작아지고 그리스도가 점점 커지시는 것이다.(요한3,30)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갈라2,20)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 안에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그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실까? 다시 인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제헌되기를 원하실 것이고 당신의 살과 피를 사람들에게 음식으로 내어주길 원하실 것이다, 즉 형제들의 밥이 되고자 하실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영성체하는 자들의 사회적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 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카12,49)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을 놓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피와 살로 우리를 양육함은 이 세상에 불을 지르기 위한 볼쏘시개로 쓰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불쏘시개가 불붙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최후만찬 때 예수님께서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 하여라”(루카22,19; 1고린11,24)하심은 빵을 축성하고 나누어 먹는 예식만 행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최후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음과 같이 그러한 봉사의 생활을 하며, 예수께서 우리 죄를 보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도 부족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셨음 같이 우리도 그렇게 희생하고 형제들에게 살과 피를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이 하나의 미사가 되고 사랑의 나라 건설을 위한 자기 변모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꽃이 없다고 한탄한다고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꽃씨를 심어야 하는 것이다.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12,24-25)

내가 사랑의 밀씨가 되어 떨어져 죽으면 백배의 사랑의 밀씨가 생기고, 그 백배나 되는 사랑의 밀씨가 또 떨어져 죽는다면 만 배의 사랑의 밀씨가 생길 것이고,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라면 나의 희생이 보잘 것 없다고 주저할 수만 없을 것이다.

 

6. 성체성사의 신비로 민족중흥의 새 역사 창조

우리 민족이 하나로 화합하고 일치할 수 있는 길은 성체의 신비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마태22,37-38)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정신 뿐이다.

진정한 애국 애민 정신은 형제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는 성체의 신비 안에서 살 때 가능하다. 최남선은 개종기에서 가톨릭 종교야말로 이 나라 이민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다.”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선조들인 이벽, 다산 형제,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이가환 등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이 땅에 천주교를 영입한 것은 단순한 종교적 차원에서만이 아니고 이 종교야말로 이 나라 이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였다.

우리 모두 사랑의 성사요, 일치의 성사인 그리스도의 성체를 방방곡곡에 전하고 삼팔선을 넘어 북한 땅에도 성체를 모시고 갈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해야하겠다. 평화통일의 그날을 위해 기도해야할 것이다.

성체의 신비로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길인 한편, 참 애국운동이요 구국운동인 것이다.

요켠대, 성체는 크리스찬 생활의 뿌리요 꽃이며 성체성사는 강생의 신비의 연장이고 인류구원을 위한 구체적 수단이다. 인류구원은 죽음과 죄악을 이기는 보약으로, 인간을 죽음과 죄악에서 해방시키며 새 인간을 만들어 인간신화(人間神化)를 이룩하고 인간사회를 혁신하는 성사이다, 따라서 이 성사를 합당하게 영하여야 하며 나아가 성체를 영하는 자는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사명을 지닌다. 성체를 닮아 사랑이 되어 이 세상에 사랑의 나라를 건설할 사랑의 씨앗이 되어야할 것이다, 성체를 통하여, 성체 안에서, 성체와 더불어, 새사람이 되어 성체의 신비로 자신을 구원하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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